어떻게든 지난 일주일의 생각과 감정을 남겨놓고 싶은데
글을 쓰기가 힘들다.
이름을 부를때, 어떤 감정이든 표현할 때
자꾸만 울컥 울컥

오늘 프레시안에 공감가는 두개의 글로 대신!

* * *

비극의 본질

빨갛게 색칠된 세상이 온통 노란색으로 물들어 버렸다. 노랗게 물든 세상에 북한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찬물을 끼얹었다. 노랗게 변해 버린 사람들은 공산혁명을 위해 죽창을 휘두르는 과격세력이 아니라 남의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예쁜 마음을 가진 청소년, 아줌마, 직장인, 일반인들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가져온 세상은 빨간 세상이 아니라 노란 세상이었고, 잔인한 무한경쟁의 세상이 아니라 서로에게 너무나 친절한 따뜻한 세상이었다.

발인과 함께 쏟아진 노란색 종이비행기, 시청앞과 광화문을 질서정연하게 메운 시민들, 촛불로 헌정된 추모의 메시지, 가슴 깊은 곳에서 쓰인 헤아릴 수 없는 메모와 광고들, 시민들의 자발적인 추모의 모임, 그리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안타까운 눈물들, 이러한 모든 것은 친북 좌익 반미 과격 혁명세력의 모습이 아니었다.

노무현의 죽음(전달력의 극대화를 위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보다 '노무현의 죽음'이라는 표현을 쓰기로 했음을 양해 바랍니다)이 곧 기억에서 사라지고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귤을 '슬쩍' 하는 장면. 그가 세운 정치 문화적 기준은 '한국의 표준'이 될 것이다.
그 러나 그의 죽음은 그렇게 일회적인,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무현의 죽음은 대한민국에 확실한 하나의 시각, 관점을 세운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정치와 지도자에 대한 기준을 세웠고, 그것은 놀랍게도 문화적 현상이 되어 버렸다.

이 점이 사실 이번 비극의 핵심이다. 일상생활의 표준이라 할 수 있는 문화는 어제 생겼다 오늘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무현은 신화가 되었고, 상징이 되었고, 영웅이 되었고, 그리고 그리운 얼굴이 되었다.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 모든 것이 다 노란색과 촛불과 "상록수"와 "사랑으로"와 함께 한 젊은이들, 그리고 예쁜 마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의 문화 속에 꽃피고 있다.

보수적인 혹자들은 걱정한다. 이 사람들이 감성에 휩쓸려 무서운 폭도로 변하고 포퓰리즘의 광풍이 불지 모른다고.

그 러나 노무현의 죽음이 만들어 낸 문화는 노란 종이비행기가 날라 다니는 예쁜, 친절한 감동의 문화다. 밤을 새서 길고 긴 조문을 기다릴 수 있는 그들을, 같이 눈물을 흘리고 공권력의 폭력에 망연자실하는 그들을 광분한 폭도로 보는 것이 과연 정확한 시각일까?

국민과 시민사회를 잠재적 폭도, 붉은 사상을 가진 잠재적 체제전복 세력으로만 본다면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국민은 통제의 대상이 될 뿐이고,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과 발언이 전부 빨갛게만 보일 것이다.

당장 집권세력의 머리속에는 "검거"라는 단어만 생각날 것이다. 집권세력이 그러한 사고를 하고 있다면 이들은 민주주의 시대의 집권세력으로서 자격이 없다.

그 런데 이상한 사실은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모이면 폭도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정치인들이 권력을 잡기만 하면 폭군으로 변하는 것이다. 촛불은 모여서 호소하고 표현하는 힘밖에 없지만 정치인과 집권세력은 법을 바꾸고, 사람을 잡아넣고, 많은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지닌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항상 통제의 대상은 그들이 아니라 국민과 촛불이 된다.

노무현으로 흥한 자 노무현으로 망하리라

이번 집권세력(한나라당, 보수언론, 보수재벌, 권위주의 세력 등)이 가진 예리한 칼은 노무현을 잘게 잘게 베었던 바로 그 칼이었다. 노무현 정권에서부터 시작해 노무현의 죽음 직전까지 그 칼은 위력을 꽤나 발휘했다.

노 무현이 세상을 빨갛게 만들었고, 엄청난 부패의 세상을 가져왔고, 경제를 완전히 망가뜨렸고, 북한은 바로 내일 모레쯤 우리에게 미사일과 핵을 쏠 것으로 이야기 했다. 노무현은 이렇게 세상이 빨갛게 색칠되는 표현의 자유조차 용인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켰지만 결국 그러한 관용으로 인해 정권을 잃고 스스로가 난도질당하는 상황으로 몰렸다.

그런데 그들은 칼을 써도 너무 잔혹하게 써 버렸다. 모든 것이 지나치면 잃어버리게 되는 법이다. 산 권력은 죽은 권력에 대해 계속 칼을 휘두르기만 하고, 산 권력이 그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전혀 보여주지를 못 했다. 계속 노무현을 욕보이면 인기가 올라갈 것이라는 전략 이외에는 전략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집권세력은 대한민국에서 주류와 강자에 도전한 자가 어떻게 칼을 맞는지를 보여 주었다. 역대 대한민국에서 가장 민주주의에 충실했던 대통령을 권위주의 독재자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했다. 그런데 국민들이 서서히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이제 고마 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돌연 그 칼이 날을 바꾸어 이제 자신을 베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노무현의 죽음이 집권세력 혹은 주류세력의 잔인함, 허구, 공포, 권위주의, 무능력을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이 노란색 자유의 문화 속으로 스며들어가 꺼지지 않을 생명력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선거를 통해 정권이 교체되는, 그리고 여론이 살아 움직이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러한 깨달음, 즉 관점과 시각의 형성은 천지를 흔드는 지각의 변동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의 정치표준

집 권세력에게 노무현의 죽음은 엄청난 쓰나미를 일으키게 되어 있다. 우선 이제 노무현을 난도질해 지지율을 끌어 올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노무현을 한국 정치에서 지워야 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노무현보다 훨씬 파괴력 있는 새로운 비전과 장점을 보여 주어야 하는데, 그러한 가능성은 요원하다.

앞으로 집권여당이 선거에서 계속 지게 되면(이길 수 있는 이유가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선거의 패배는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고 간 그 정권에 대한 심판으로 해석될 것이고 정부여당은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에서 반민주 정권으로 각인될 것이다. 결국 비주류와 약자를 억압하고 죽인 반민주 정권이라는 오명과 책임이 현 정부와 여당에 유령처럼 붙어 다닐 수밖에 없다.

더 욱 중요한 것은, 앞으로 노무현이 한국 정치에서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노무현이 대한민국에서 하나의 문화로 착근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평화와 민주주의의 색깔이 노란색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친근한 사진은 계속 발굴되고 계속 떠다닐 것이다. 미국에 케네디가 있다면 한국에는 케네디와 제임스 딘을 합친 상징력을 가진 노무현이 새로 태어났다. 젊은 세대와 민주화 세대는 앞으로 계속 노무현에 열광할 것이다.

노무현의 죽음은 한국 정치지도자의 표준(Korean Political Standard)을 만들어 냈고, 이제 그러한 표준에 대한 국민적 합의(Korean Consensus)가 생겨나는 과정이다.

노무현이라는 상징은 머지않아 아시아 민주주의의 표준이 될 것이며, 그러한 'Korean Consensus'는 이제 대중문화를 넘어 정치문화에 새로운 한류를 만들어 낼 것이다. 이러한 어마어마한 흐름을 집권세력은 읽고 있을까?

민 주주의의 후퇴를 슬퍼하는 사람들은 이제 새롭게 형성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표준과 합의를 한국의 진정한 문화 속에 어떻게 녹여 넣을 것인지를 고민하고, 거기에 맞는 비전과 정책을 고민해야 한다. 특권을 포기하고, 국민과 함께하며, 국민과 아픔을 나누는 지도자의 모습에 이제 정책과 비전이라는 콘텐츠를 채워 나가야 한다.

다 음 지도자는 노무현의 이미지만으로 비주류와 약자를 구원해 내질 못한다. 문제는 비전과 정책이며 그러한 비전의 세력을 결집해 내는 데 있다. 그리고 지도자를 좋아하고 존경하지만 논쟁과 비판 속에서 함께 해야 한다. 그러한 논쟁과 비판 때문에 노무현이 자신을 부엉이바위에 던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다 안다.

우리는 희망을 보았다. 촛불의 모임은 적자생존의 모임이 아니라 "따뜻한 자 생존"의 모임이라는 희망을.

삼가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노무현의 서거 이후에 나를 애타게 찾는 아이가 있었다. 이전에 하자센터에서 인문학을 같이 공부한 아이였는데 노무현이 죽고 나서 계속 눈물 바다란다. 주변 사람들이 딱해서 못 보겠다고 나보고 연락 좀 하라고 성화였다. 아이에게 간단한 문자 하나를 보냈다. '너 지금 만나면, 내가 나를 주체 못할 것 같다. 좀 지나고 보자.' 난 이 아이가 서럽게 우는 그 이유를 듣는 것이 두렵다.

후배 중에 덕수궁에 가서 절대 조문 같은 걸 안할 것 같은 친구가 있다. 이 친구가 조문을 갔다 왔다고 한다. 자기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라 자기만큼이나 그런 곳을 안 갈 것 같은 '탈정치화'된 자기 친구가 가자고 해서 갔단다. 가서 그 친구가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왜 우냐고 물으니 후배 입을 틀어막으면서 '묻지 마. 그냥 슬퍼. 그냥 나 좀 슬퍼하게 해줘. 그냥 울고 싶어'라고 하더란다. 그 친구 우는 걸 보다 자기도 슬퍼져서 울었다고 한다.

친한 교수 중에 한 사람이 대학원 수업 시간에 한 시간이나 넋두리를 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압권이 자기가 그렇게 슬퍼하는 걸 보면서 스스로 놀래서 '어머 나 어떻게 해. 나도 몰랐는데 나 '노사모'였나봐'라고 한 말이다. 물론 이 교수는 노사모가 아니다. 교수는 넋두리 하는 내내 노무현이 자기에게 이렇게 가까이 있고 자기가 그렇게 노무현에 밀착되어 있는지를 몰랐다며 스스로도 헷갈려하였다. 수업 내내 다른 대학원생들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고 한다.

슬퍼하지 않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아는 기자가 문자를 보냈다. '아…. 이 긴 행렬은 무엇일까요. 별로 슬프지 않은 나는 진정 사이코패스인가요?' 슬프면 슬픈 대로, 슬퍼하지 않으면 슬퍼하지 않는 대로 우리 모두가 어떤 것에 감염이라도 된 듯하다.

우린 무엇을 슬퍼하는 걸까. 우리는 노무현의 죽음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사회주의자'에서부터 '자유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이토록 절절하게 애도하고 있는 것일까? 이미 많은 해석들이 나왔다. 공모를 한 것 같은 죄책감부터 정부에 대한 분노까지. 잠시 질문을 바꾸어보자. 우리가 '왜 노무현의 죽음을 슬퍼하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이 슬픔으로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로.

▲ "우린 무엇을 슬퍼하는 걸까. 우리는 노무현의 죽음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사회주의자'에서부터 '자유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이토록 절절하게 애도하고 있는 것일까?" ⓒ프레시안

그의 장례식에 이르기까지 많은 친구와 선후배들, 그리고 학생들의 하소연을 듣다 나는 문득 알게 되었다. 이 사람들, 노무현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노무현의 죽음에서 이들이 본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꼬라지'이다. 지금 여기서 사는 모습의 궁상맞음과 망가짐과 팍팍함과 초라함과 강퍅함을 슬퍼하고 있는 게다. 우리는 노무현의 죽음에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의 비극을 보았다.

권력의 정점까지 올랐던 대통령마저도 알고 보니 '텅 빈 생명', '벌거벗은 삶'이었다. 그의 삶 전체가 조롱당하였지만 그는 무력하였다. 그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 모두가 다 한 외신의 표현대로 하면 들들 볶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유서에 나오는 것처럼 그는 남은 여생, 주변사람들에게 짐만 될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이었다. 그의 죽음뿐만이 아니다. 최진실의 죽음에서 사람들이 본 것도 참 가진 것 많고 남 부러울 것 없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이 알고 보니 텅 빈 삶을 살았다는 것에서 오는 동정과 연민이었다.

산 다는 것이 위대하기는커녕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고 보잘 것 없으며 헛헛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우리는 최진실의 죽음에서 보았다. 노무현의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정서는 최진실의 죽음이 불러일으킨 정서와 그리 멀지 않다. 그가 가고 난 다음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삶이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정점에 올랐던 최진실의 죽음에서 많은 여성들이 그들과 다르지 않은 '같은 여성'의 삶의 강퍅함에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말이다. 몰락이, 죽음이, 나락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것. 저런 사람들마저도 삼키는 그런 나락이 우리 삶에 아가리를 떡 벌리고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 그 나락을 보며, 우리는 나락에 떨어져 죽은 자를 보며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락 옆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애도하고 있다. 우린 정말이지 산다는 것이 품위 없고 보잘것없으며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 죽음이 아닌 산다는 것에 대한 애도가 있다.

왜 그를 미워할 수 없었던가. 그는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 분열적이 될 수밖에 없음을, 권력의 정점에서도 보여주었다. 분열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전교조의 교사가 자기 아이에게 사교육을 시키고, 공교육이 싫어서 대안학교를 보낸 학부모가 방학이면 선행 학습과 과외를 시킨다. 직장을 때려 치고 나와 카페를 차리고 공동체 운동을 하는 후배는 주식투자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으며, 양심적으로 살아가며 많은 시민단체를 후원하는 친구는 들어가 살 만하면서 투자 가치가 있는 아파트를 보러 다닌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분열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분열의 빈틈에서 적당한 합리화와 죄의식이 뒤죽박죽으로 엉켜있는 채 우리는 살아간다.

노 무현은 권력의 정점에서 이런 분열적인 삶을 보여주었다. 진보신당의 게시판에서 한 당원이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는 날 노무현이 멍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향해 '지금 국민들이 저를 보고 계십니까?' 하고 말한 장면을 보고 그의 고독을 느꼈다고 하였다. 바로 그것이 노무현의 분열이었다. 그는 집권 기간 내내 그의 영혼과 그의 통치가 분열되어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국가인권위가 파병을 반대했을 때 '국가인권위원회는 그런 것을 하라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을 했을 때, 대통령 못해먹겠다고 말을 했을 때. 봉하로 내려가서 한 첫 번째 말이었던 '죄송하지만 참 좋다' 등. 그는 집권 내내 항상 자신의 영혼은 자신의 통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있는 곳에 있다'는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나는 비록 지금 당신들이 반대하는 것을 하지만 나의 영혼은 당신들과 함께 있습니다.' 이것이 집권해 있을 때는 그를 변명으로 일관하는 비겁한 대통령으로 만들었지만, 막상 그가 가고 나자 우리들에게 '분열적일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인 우리 모두의 초라하고 팍팍한 삶을 그를 통해서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그의 통치에서 그가 자신의 영혼과 통치를 분열시키지 않았던 몇 개 안되는 정책 중의 하나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라크파병과는 달리 정말로 한미 FTA를 누구로부터 등 떠밀려서 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살릴 길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가 퇴임 이후 봉하로 내려갔을 때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의 성공을 빌었다. 사람들은 그가 죽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니 참 좋다'고 활짝 웃었던 것처럼 봉하에서 영혼과 삶이 일치하여 살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시골로 내려가더라도 그런 삶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죽음은 그런 통합적이고 '참 좋은 삶'이라는 것이 이 땅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절망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젠장. 조선 천지에, 어디에도, 율도국 따위는 없다.

집권 기간 내내 그가 보여준 분열과 봉하에서의 짧았지만 행복했던 순간들. 그래서 그를 단지 신자유주의자라고 말을 하는 것은 부족하다. 적어도 하나 확실한 것은 그는 신자유주의자이지만 이명박 대통령이나 다른 신자유주의자와는 결정적인 점에서 하나 다르다는 점이다. 그는 통치자로서 정책적으로는 신자유주의자였지만 그의 인간관은 신자유주의가 아니었다. 인간에 대한 관점이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통치의 이데올로기와 달랐던 것. 이것이 그의 분열의 근본이며, 죽음 전과 후에 사람들이 그에 대해 느끼는 정서의 가장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가 그냥 신자유주의자였다면 그는 봉하로 내려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의 비애를 그렇게 표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인간관은 참 뜨거웠다.

그래서 그의 삶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은 정치를 하는 동안에도 늘 실패하는 정치인으로 비극적이었고, 대통령이 되어 통치를 하는 동안에는 자신의 영혼과 대통령으로서의 자기의 역할이 분열되었던 비극적인 사람이었고(으로 이제는 기억되고 있으며), 그 좋다던 봉하로 내려와서도 결국은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못한 비극적인 인물이다.

우린 그의 삶에서 비극을 본다. 그리고 그 비극은 남의 비극이 아니라 죽음에 가까워져 있는 우리들의 삶이다. 우리는 그의 비극에서 우리의 삶과 운명을 보았으며 그 비극에 감응되어 우리의 삶을 슬퍼하고 애도한다.

그런데 우리가 애도하는 것이 우리 삶의 비극이라면 나쁘지 않다. 충분히 울고 난 다음, 비로소 우리는 힘을 얻고 용기를 내어 새로운 시작을 시작해볼 수 있는 용을 써볼 수 있을 테니깐 말이다. 충분히 슬퍼하자. 그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죽음에 가까워진 우리들의 운명과 삶을. 충분히 울고 난 후에야 우리는 사람 하나 자르고 책임을 묻는 것으로는 끝낼 수 없는 노무현을 넘어 이 삶의 분열과 비극을 종식시킬 수 있는 그런 방법을 찾아볼 수 있을 테니.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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