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서울북페스티벌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축제장에서 보고 들었던 사서들의 이야기였다. 축제에서 만난 사서들의 이야기는 여러모로 반가운 구석이 많았다. '사서의 일상'이라는 짧은 동영상은 사서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깨는 동시에, 직업인으로서의 동질감 같은걸 느끼게 만들었다. '사서들에게 물어보세요.' 코너에는 내가 쓴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나의 궁금증이 누군가들에 의해 대신 쓰여 있었다. '사서들은 책을 많이 읽나요?' 같은 질문은 정말 나도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것이었는데, 단 한번도 그것을 직접 물어볼 생각도, 그럴 계기도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럴 수 있는 계기가 눈앞에 나타난 후에, 그제서야. 


 축제의 준비과정과 현장에서 보고 들었던 사서들의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 수록 그들의 일상을, 도서관의 일상을 더 궁금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흔히 축제의 정수를 일탈성이라고 하는데, 사서들은 그들의 일상적 업무에 비추어, '축제'라는 것을 만든다고 마음먹는 것 부터가 용기가 필요한 일탈이라고 느끼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왜 도서관에서 축제를 해야 하는가 반문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사서가 해야 하는 수많은 업무 중 가장 사서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축제 만들기가 아닐까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올해 서울북페스티벌은 사서들이 일상을 이야기하는것 만으로도 그 일탈성에 가까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축제를 통해 도서관이라는 공간 속의 자신의 일상을 평소와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계기를 가지게 된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말로 꺼내어 풀어내기 시작한 이들은 스스로 한 껏 들떠있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리고 그 이야기에 누군가 공감할 때 정말 신이 나는 법인데, 축제 속에서 그 신나는 기운이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축제가 끝나고 며칠 후에 집 앞에 있는 사당솔밭도서관에 들를일이 있었었다. 2년전 쯤 도서관이 개관된 후 꽤 자주 그곳을 이용하고 있는 나는, 그날 처음으로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서님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왠지 모르게 너무 반가운 마음이 들어 평소 보다 더 환하게 웃으면서 인사를 했고, 사서님도 환한 웃음으로 응대했다. 축제에서 사서들의 이야기를 듣고 몇분짜리 영상을 봤다고 해서, 수줍고 소심한 내가 우리동네 사서에게 궁금했던 일상적인 이야기를 질문하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분명히 변해있었다. 늘 그래왔듯 우리는 도서관 이용객 대 사서로 민원처리를 위한 아주 기능적인 몇마디 말을 주고받는 것 뿐이었지만, 그 과정이 이전보다 친근하게 느껴졌다. 


 노트북 열람석에 앉아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법 관련 책을 펼쳐놓고 공부하는 학생, 매일 pc석을 차지하고 부동산 경매강의를 듣는 할아버지, 어린이 도서관과 프로그램 공간과 열람실을 골고루 누비고 다니는 엄마와 어린 딸 등 도서관에 오면 꽤 자주 마주치는 얼굴들이 보였다. 도서관이라는 공간의 속성 때문인가, 자주보는 익숙한 얼굴이지만 말은 나누어 본적 없는, 도서관에서 조용히 외딴 섬처럼 있다가 흩어지는 사람들이 눈에 보였다.  


  그날 도서관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만약 우리 동네에서 도서관 축제가 만들어 진다면, 저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거나, 저들의 이야기를 한번 쯤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면 좋겠다고. 서로 다른 시간대의 문화교실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배웠으며 그 안에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 부터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우리 동네의 독서 동아리들이 올해 어떤 책들을 같이 읽었는지, 그 책에서 어떤 이야기를 발견하고 나누었는지를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결국 도서관에서 축제를 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기 위함이 아닐까. 조금은 쉽고 눈길을 끄는 방식으로, 도서관 안에서 외딴 섬처럼 존재하는 사람들과 책들과 프로그램들이 서로에게 말을 걸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 지금은 비록 따로 떨어진 섬이지만 말을 걸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 사이에 숨어있던 연결고리가 발견되거나, 새로운 연결고리가 발명될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축제가 끝나면 다시 열람실에서 섬처럼 있다 흩어지는 일상으로 돌아갈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이엔 무언가 분명 변해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그렇게 축제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축제라면 도서관이라서 어울리지 않는 축제가 아니라, 도서관이기 때문에 필요한 축제가 되지 않을까.


 우리의 일상은 너무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도서관을 활용하는 방식도, 열람실에 앉아 각자가 하는 일도, 즐겨 읽는 책의 분야도 다르지만, 일단 말을 걸고 조금씩 내 이야기를 꺼내다 보면 우리에게 이렇게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았다는 사실에 놀라게 될지 모른다. 새로운 친구에게 부담없이 말 걸기에 축제만큼 좋은 때가 없고, 그곳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함께 읽은 책만큼 좋은 것이 또 없어 보인다. 나와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줄 알았던 사람이 나와 같은 소설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내가 전혀 관심없던 분야의 책 속에서, 뒷통수를 탁하고 때리는 문장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축제를 상상한다. 언제부턴가 좋은 책 한권을 온전히 읽는 시간보다, 좋은 책 한권을 고르기 위한 소개글을 읽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는 내게, 이야기가 잘 통하는 친구를 만나 그들의 책장에서 맘에 드는 책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축제를 상상한다. 




#2015 서울북페스티벌 자료집에 기고한 글

#맨날 보고서만 쓰다가, 이런 글을 쓸 기회가 생겨 너무 좋았던!





# 2014년 서양사상사 수업때 쓴 서평

#나오늘사실누가나더러농담아니고진짜로아나키스트냐고정색하고물어서맘상했어ㅋㅋㅋ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

아나키즘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무엇일까?



아나키즘의 세계관: 무질서가 아닌, 자신이 합의한 질서를 추구하다.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의 이상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자칫 모순적으로 보이는 두 개의 주장에서, 그가 말하는 자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이 주장하는 자유란 형벌 자체를 폐지하고, 그 형벌의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자유는 사회적 형벌의 두려움을, 신체적 혹은 기아의 공포에서 비롯된 형벌 혹은 비난에 대한 두려움을 자기 행위의 판단에 개입시키지 않고 행동할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밀이 ‘모든 타인들의 권리를 해치지 않는 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리’라고 정의한 자유의 개념에 대비시킨다. 밀의 자유 개념에 등장하는 ‘권리’에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보다 구체적으로는 국가적으로 정해놓은 ‘해도 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법이나 제도 등과 같이 합의된 실체로서의 내용이 존재하는 권리가 있는 한,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정이나 판단에 사회적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개입시킬 수밖에 없게 된다. 크로포드킨은 밀이 주장한 자유 개념이 재판, 형벌, 심지어 사형 까지 포함한 국가의 모든 권리를 정당화 하고 부활시키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친구의 비난과 국가의 형벌은 어떻게 다른가? 또한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유에 대한 이러한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나키즘의 세계관에 대한 검토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아나키의 철학과 이상이라는 논문에서 크로포트킨은 당대의 과학의 발전으로부터 이어진 새로운 사유 방식과 세계관에 대해 소개하면서, 아나키즘도 그러한 흐름에서 나온 하나의 줄기라고 소개한다. 과학에서의 새로운 접근 방식이란 거대한 전체를 다루던 과거의 과학이 아닌, 독자적이며 개체화된 동시에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 요소들에 대한 관심을 말한다. 이러한 사유의 방식은 인간에 대한 과학에도 적용되어, 이전에는 황제나 민족이 역사적 탐구의 단위였다면, 당대에는 전에 주목을 받지 못했던 민중들, 개인들에 대한 관심이 연구의 단위가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사유의 흐름에서, 아나키즘은 큰 권력이나 전체주의적인 거대한 힘이 아닌, 민중들의 힘의 역동에서 혁명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나키즘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개인들이, 그리고 개인들의 자발적인 연합이 자신들의 환경 속에서 조화로운 합의를 실현하기 위해 자유로운 발전, 자유로운 발기, 자유로운 활동, 자유로운 연합을 할 수 있는 사회이다. 그 사회가 발전하는 방향은 정해진 것이 아니며, 법과 같이 경직된 기존의 형식들을 거부한다. 오히려 그 사회는 다양한 힘과 영향 사이의 지속적이면서도 변화하기 쉬운 균형 속에서 조화를 찾는다. 이것이 가능하다고 본 이유는, 역사적으로 동물은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존재이며, 관계의 조화를 추구하기 위한 상호부조의 동기를 진화적으로 발달시켜 왔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아나키즘에서 가정하는 개인은 밀접하게 연결된 관계 속에 동기를 발전시키는 존재이고, 개인의 선택과 행동은 그 관계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관계성 위에서 개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자유 또한 필연적으로 관계성을 포함한다. 나는 크로포트킨이 이러한 관계에 대한 가정 위에서, 어떤 경우에도 개인은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임을 역설했다고 이해했다. 친구의 비난과 국가의 형벌로 부터의 자유의 차이를 언급한 것은 상대적으로 평등한 관계에서 상호간의 조화를 고려하여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상황과, 평등하지 않은 관계에서 권력으로부터 부과된 제한을 고려하여 행동할 수 있는 상황의 차이를 역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자유는 무질서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상호 관계 속에서 조화를 원칙으로 한 발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상대를 배려하거나 어떤 의무를 가지는 것, 즉 자발적으로 합의한 질서 내에서 추구하는 자유를 의미한다. 


왜 크로포트킨은 국가에 대해 반대했을까?

  아나키즘의 가장 논쟁적이면서도 오해의 여지가 많은 부분이 국가에 대한 아나키즘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크로포드킨은 중앙집권적 제도의 실체로서의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건강한 공동체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문제의식에서 국가의 폐지를 주장한다. 그는 당대의 권력과 법 제도 등의 집행이 제국주의적인 국가라는 제도적 틀 속에서 집중되면서, 기존에도 사회적 기능을 유지하고 있던 원시 종족이나 농촌공동체, 공화 도시의 자유로운 합의와 연합의 기초한 조직으로의 특성이 약화되어 간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당대의 상황에서 그가 국가의 폐지를 주장했지만, 정부의 역할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가 오랜 역사 속에서 ‘사회’라는 것이 다양한 모습으로 항상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 자생적, 자율적 공동체들이 연방의 형태로 발전할 필요성을 역설한 점 등을 미루어 보면 그가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그가 비판한 국가의 모습이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가 비판한 국가는 구체적으로 오랜 역사 속에 존재하는 사회의 한 형태로서의, 권력이 집중되고 사회적 위계를 만들어 불평등을 조장하는 중앙 집권 형태의 국가에 제한 된다. 그는 인간들이 자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다른 형태의 사회를 조직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국가에 대한 폐지를 주장했다고 볼 수 있다.  

 공산주의 사회를 꿈꾸었던 크로포드킨은 사회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낡은 조직을 폐지하고, 국가를 폐지하고 농촌 공동체, 자유노동조합 등의 사회단위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연합형식을 창조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크로포드킨의 아나코-코뮤니즘의 핵심적인 내용이기도 했는데, 이는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국가를 전략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보았던 마르크스 등과는 다른 의견이었다. 그는 국가와 같이 낡고 이미 존재하는 조직들을 사용하게 되면, 고유한 발전 과정을 가지는 제도 자체의 특성에 의해 혁명을 위한 운동이 제도에 흡수 될 것을 우려했고, 새로운 연합 형식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당대 지배적이었던 국가를 폐지하는 것이 우선이라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아나키즘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국가가 강력한 기능을 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국가가 없는 모습을 상상하기는 힘들다. 크로포트킨이 살고 있던 시대에 비해 몇 백배는 더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는 많은 사회적 기능과 정보가 국가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 단위에서 아나키즘적 논의를 하는 것은 자칫 허황되거나 무모한 논의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아나키즘이 지향하는 사회의 모습, 무엇이 사회적인 것이며 어떤 이상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아나키즘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역설적이게도 사회가 복잡해 지고 비대해 질수록 더 중요해 진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이는 작은 단위로부터 변화를 시도하고자 하는 많은 조직과 운동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변혁을 꾀하는 국내외의 진보적 사회운동들은 과거에는 국가와 같은 거대 단위의 전면적 개혁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오늘날에는 그러한 개혁의 문제와 한계를 절감하고 작은 단위에서부터 변화를 꾀하고자 하는 운동과 캠페인이 많아졌다. 거대단위의 문제 해결력이 미치지 못하는 많은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이 발생함에 따라,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문제해결 능력을 가지는 자치적 단위를 회복시키려는 작은 시도들이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다. 나는 오늘날의 이러한 운동들이 아나키즘과 많이 맞닿아 있을 뿐 아니라, 운동의 전개에 있어 아나키의 사상을 심도있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나키즘이 가지는 이상적 사회의 모습, 그리고 크로포트킨이 말하는 혁명의 승리는 상호신뢰 및 상호부조에서 출발하고 개인의 용기, 주도권, 연대를 필요로 한다. 필자는 아나키즘을 처음 접했을 때, 아나키즘이 그리는 이상적 사회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에 대해 너무나도 낙관적인 인간관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가졌었다. 모든 사회의 구성원이 용기와 주도권을 가지는 사회를 상상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크로포드킨은 일정한 동물사회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일정한 동물 사회에서 평등과 연대의 원리가 발전하고, 그 원리가 변하여 그들의 습관이 될수록 그 사회는 더 큰 생존의 기회를 갖게 되며, 불리한 환경과 적과의 싸움에서 승자가 될 기회가 증가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사회 각 구성원들이 다른 구성원과의 연대를 더욱 생생하게 의식할수록, 사회 모든 구성원 속에 승리와 진보의 결정요소인 두 특성이 더욱 발전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용기와 주도권이다.” 즉, 크로포드킨은 개인의 주도권과 용기를 회복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상호 신뢰와 연대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 질 수 있으며, 이러한 개인적 조건을 갖추는 것 또한 개인적 과정이 아니라 사회적 과정임을 주장하는 셈이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대 사회 전반에서 이러한 원리를 주장하기는 힘들겠지만, 특정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작은 공동체나, 비슷한 공동체들의 연대와 같은 활동에서 크로포드킨의 주장은 시도 가능하고 실현 가능해 보인다. 위에서 주도하는, 일방향적이며 발전의 방향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방식의 진보가 아니라, 상호부조와 연대 속에서 개인의 자유가 활성화 되고, 개인의 성장과 공동체의 성장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하는 진보. 바로 이러한 것이 아나키즘이 주장하고자 했던 진보의 방향이고, 현대의 사회 운동들이 한번쯤 고민해 봐야할 아나키즘의 교훈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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