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날이 갑자기 추워졌고, 
가로등 불빛이 찬공기에 더욱 투명해 졌고,
그럴수록 초저녁은 조금 더 서글퍼지기 시작했고,
겨울냄새와 함께 설레임인지 그리움인지 모를 감정이 찾아들어와 
며칠째 내 마음을 툭툭 치고 있다. 
진짜 겨울이 시작되려고 하나보다. 

2.
대구에 내려와서 지낸지 벌써 10개월이다. 
봄날 장농속으로 고이 접어 넣어두었던 황토매트리스를 다시 꺼내어 침대에 장착했다. 
그러니까 네개의 계절을 보냈고, 또 다시 겨울이 온것이다.

3.
곰곰히 생각해보면 난 지난 네개의 계절을 그 어느때 보다 열심히 보낸거 같다. 
이전처럼 힘들게 일을 하거나, 바쁘게 사람들을 만나며 지낸건 아니지만 
평균적으로 꽤 규칙적이고 부지런한 생활을 한 것 같다. 
아주 작은것에서 부터 좋은 결과들이 하나 둘 생겨나고,
그럴수록 계속해서 달리지 않고 잠깐 쉬었다 가기로 결정한 나의 선택에 만족했다. 
무엇보다 요즘은 '인간은 아마도 죽을때 까지 성장을 계속할 것'이라는 믿음에 조금 더 가까이 있다.  
기술이나 도구, 혹은 노화로 인한 특정능력의 퇴화는 있을지언정,
궁극적으로 인간은 진보한다는 확신같은게 생겼달까. 

4. 
일년전의 나보다 훨씬 안정된 마음을 가질 수 있는건,
조직에 소속된것과 아닌것, 혼자 사는 것과 가족과 사는 것의 차이도 큰 변수일테지만
결국 삶의 질을 바꾸는 힘을 가진 것은 '변화'보다는
'일상'을 어떻게 영위해 나갈것인가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간 조직내에서 팀과 일할때 생기는 갈등이나 비효율 대신, 프리랜서로 일하는 외로움과 또다른 책임감도 맛보고,
가족과 살아서 외롭지 않은 대신에 작고 사소한 다툼을 매일 반복하기도 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또다른 갈등에 부딪히면서 당황도 적잖이 했지만 
확실한건 일년전의 나보다 나의 삶과 내 주변을 바라보는 시야가 아주 조금은 넓어졌다는 거겠지.
문득 일년전 혹은 이삼년전의 나를 돌아보면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오르기도 하고,
아직 내가 아는 세상보다 알아가야할 세상이 비교 할 수없을 만큼 클 것을 상상하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지만, 
이렇게 조금씩 시야가 넓어 지고 성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그나마 위안이 된다. 
뭐, 나는 신이 아니잖아! ㅋㅋㅋ 
 

5.
사실, 며칠전에 연선언니가 블로그 글이 한 여름에 멈춰있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냥 무덤덤하게 넘겼지만, 언니! 사실 나도 요즘 답답해 하고 있어 ㅋㅋㅋ
블로그에 글을 못써서 답답한게 아니라, 그냥 사소하게 떠들고 싶은데 마땅한 매체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달까. 
트위터랑 페이스북 같은걸 하다보니 예상치도 못한 사람들과도 연락이 되고 
꼭 문자주고받는 느낌이 들어 친근감도 있고 하지만-  
예전 싸이월드 다이어리정도의 '혼자서 떠드는 것 같지만,
암묵적인 독자층이 분명한' 그런 매체를 잃어버린 느낌이랄까. 


6.
뭐 어쨌든, 요즘 보고싶은 얼굴이 너무 많다. 
밀크티나 한잔 하자. 입술에 우유거품 하얗게 묻혀가며.












지나가는 차도, 인적도 없는 기묘한 길을 달렸다.

가끔씩 있는 촌스러운 표지판에 이끌려
조용히, 천천히, 묘한 기분으로 달려가다보니
텅빈 집 한채, 결번일 것만 같은 전화번호,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절집같이 생긴 교회,
관리하지 않아 잡초가 나있는 주차장이 나타났다.

숨죽이며 한걸음 한걸음 그곳을 둘러보다,
에이 별거없네, 하며 다시 차에 올랐다.
혹시나 핸드폰이 안터졌으면 좋겠다고 내심 생각하다,
걸려온 전화가 잡음하나 없이 빵빵 잘터져서 살짝 김이 샜다.
그리곤 내려오는 길에 피식 피식하고 혼자서 웃었다.

기묘한 날이었다.

어쩌다 들어선 길도,
어쩌다 만난 사람도
모조리 기묘한 날이었다.

배추 싣기가 한창인 밭에서, 고무장갑 낀 아주머니와 인터뷰를 하고,
수천년 역사에도 전쟁이 알아서 피해 갔다는 마을을 방문했고 (그래서 마을 이름이 '도리'다 도리도리 )
그 시골마을에서, 내가 한때 정말 자주 방문하던 노짱 홈페이지를 기획했다는 사람을 만났다. (그분은 귀촌을 하셨다고 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연상케 하는 시골 읍내의 라이브카페를 방문했고,
(사실 조금은 무서웠지만) 마음만은 정말 따뜻한, (그리고 매우 촌스럽지만) 그들의 마음을 사랑스럽게 표현하는 밴드를 만났다.
금요일 밤, 시골읍내의 밤은 도시의 밤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고,
나는 어색하게 밝은 롯데리아에 앉아서 그날의 생각과 느낌을 정리하려고 애를 썼다.

욕망과 욕심,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 생각을 했고,
현실적이고, 거침없고, 솔직한 사람들의 욕망과 욕심에 비해
너무도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욕망과 욕심을 가지는 정책들을 생각했다.
어째 크게 어긋나 있는것 같지만, 깊이 파고 들면 비슷한 원리일지도 모른다.

거침없고 촌스러운 표현을 쓰는 사람들 앞에서 내내 어색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이렇게 생생한 언어를 먹물냄새가 나는, 다시말해 '고상한' 언어로 바꾸려는 강박을 가진 학자나 전문가들이 더 촌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생각이 들면서 어색한 기분의 나, 자꾸만 고상한 언어를 쓰려고 하는 내 자신이 촌스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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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짧아 붙잡아 두고싶은 스물일곱의 가을은
겨울로 넘어 갈듯 말듯을 반복하며 길게 이어졌다.
내 마음을 들킨듯

그 어느때의 가을보다 예민하게,
가을비에 젖은 낙엽처럼 나른하게,
황금빛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처럼 눈부시게
나무냄새를 품은 바람처럼 가볍지만 엣지있게

긴 가을, 그치만 늘 짧게만 느껴지는 가을

언젠가부터 내게 익숙한 가을의 느낌은
늘 갈색빛에, 정적이거나, 무거움 약간의 느낌이었는데

태어나서 스물일곱번째 가을을 맞고서야
가을이라는 녀석을 찬찬히 들여다 보니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거리의 풍경이
그 어떤 계절보다 다이나믹하더라.

그래서 늘 짧게 느껴졌던게 아니었을까.
단풍 시즌도, (내가 단풍 보다 더 좋아하는) 낙엽시즌도
순식간에 지나가버리니까.

가을처럼 다채로웠던 내 스물일곱의 가을
순식간에, 그렇지만 많은 감정과 사건이 다채롭게 지나간
스물일곱의 가을.

며칠동안 ‘스물일곱의 가을’이라는 제목을 써놓고
일기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스물일곱의 가을은 기록하기 너무 조심스럽지만
꼭 기억하고 싶은 계절

조급하게 결론을 내고 싶어하던 수많은 일과 감정사건 중 무엇하나 명확하게 정리 된 것이 없고, 
조심스럽고, 애매모호하고, 밀고, 땡기고해야하는 것은
갓 만난 사람이나 오래지낸 친구나 가까이지내는 동료나 사업상 클라이언트나 마찬가지이고 
온 얼굴과 몸으로 표현되는 내 감정선은 붕 떴다가, 빵 터지기도 했다가, 울그락 푸르락 하기도 했지.

그치만 스물일곱의 가을의 안쿵쿵은
그 어떤 계절보다 다이나믹했던 스물일곱번째 가을을 즐겼던것 같아.
갈색빛 무거운 가을이 아니라, 총 천연색으로 다이나믹하게.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아도, 조급해 하지 않아도
그 일과 감정들은 그 자체로 내게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에 대한 영감을 주었고,
그 무엇보다 스물일곱의 가을엔 ‘생각보다 허술한 세상’보다는,
‘생각보다 온전한 우주를 가진 개인’, 개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던것 같아.  

그래도, 아니 그래서.
내내 즐거웠어 : )  
비비다이나믹!

음. 일기를 쓰다가 생각이 난건데. 
얼마전에 누가 나한테 ‘안쿵쿵한테 재미 없는게 어디있어!’하고 웃으며 역정을 낸 기억이 떠올라서...  =ㅛ=
그러고 보면 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절이 없어 ㅋㅋㅋ
그리고 딱히 의미 없는 시절이 있을리도 없어. ㅋㅋㅋㅋ
단지, 기억력이 너무 좋지 않으니까, 이렇게 기록하면서 정색하나봐. 음...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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