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조금은 우울하고 막막한 기분으로 스물여덟의 마지막달을 보냈다. 아기다리고기다리던 대학원 합격, 그러나 막상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산을 하나 넘고 나니, 눈앞에 더 높고 험한, 커다란 산이 기다리는 느낌. 내가 감당하기 힘든 선택을 한 건 아닐까하는 생각도 조금은 들었다.

딱, 10년만이다.

01학번 새내기로 갓 상경했을 땐, 온통 들떴던 기억밖에 없다. 그 때라고 걱정이 하나도 없었을 리가 있나. 원래 세월이 지난후의 기억이란 좋은 것만 골라 예쁘게 포장 된 다소 허세가 있는 녀석이므로 그냥 귀엽게 넘어가도록 하자. 그러나 분명한 건, 딱 10년 만에 맞이하는 변화가 마냥 들뜨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그 까이 꺼,

사실은 한 달 동안 서울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왜 우울하고 막막한 지, 이유를 백 개도 더 만들어 놓았다. 열아홉 살엔 아무것도 몰라 들떴던 기분이, 지금은 마냥 그럴 수 없는 이유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막상 이 글을 쓰다 보니 내가 별 투정을 다 부렸구나 싶다. 고작 십년 더 살았는데, 그 간 인생을 알았으면 얼마나 더 알았다고.

뭐.

열아홉 살에나 스물아홉 살에나 우리가 맞이하는 매일 매일이 새롭긴 매 한 가지일 테지. 과정은 계획과 늘 다른데, 나중에 정리해 보면 결과는 목표에 얼추 가까워 있고,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는 타이밍은 늘 기가 막히고, 이전엔 전혀 관심 없던 주제에 어느 날 갑자기 꽂혀서 밤새 잠도 안자고 설레기도 하겠지. 그리고 조금 시간이 지난 어느 날에 ‘돌이켜 보니 깨알 같았다’고 추억하겠지.

어찌되었건,

새로운 10년, 그래서 조금은 더 특별한 새해가 시작되고 있다. 가만히 앉아서 지난 10년을 돌아봤다. 어떤 기억은 없어지고, 어떤 기억은 포장되고, 어떤 기억은 변형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시간들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 10년 전의 나는 감히 상상도 못했을 우연들과 그것을 선택하는 일을 반복한 결과, 지금의 나는 10년 전에 상상했던 것 보다 조금 더 멋지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동안 나의 가족과 친구, 동료들도 자신들의 시간을 켜켜이 쌓아가며 내가 닿을 수 있는 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직 ‘자신’ 할 것

새로운 10년을 맞는 나에게, 그제까지 스물여덟 살이었던 내가 줄 수 있는 충고는 이런 것이다. ‘주눅 들지 말 것, 그리고 오만하지도 말 것. 오직 ‘자신’ 할 것.‘ -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누가 뒤통수를 후려 쳐도, 완전히 새로운 땅에 던져져도. 비교적 최근의 중요한 발견 중 하나는 내가 다소 자신감이 없을 때 이를 방어하기 위해 오만해진다는 점이고, 최근 2년간 가장 큰 깨달음이 있다면 ’자신‘할 때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책 없이 해피고잉

말하자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안쿵쿵’답게 살자는 말인데, 이건 스무살 때도 입버릇처럼 말하던 거니까, 10년이 지나도 난 뭐 별다른 참신한 성장을 하지 못한 걸까, 아니면 그때부터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맘 편하게 후자라고 생각하자.(ㅋㅋ) 대책 없이 해피엔딩하는 성향은 하늘이 주신 능력이니 감사하게 생각할 것. 그리고 일단 가보자. 스물아홉도. 대책 없이 해피고잉!

주석 1)
새해가 된 기념으로 일기한편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 사실은 ‘기념’같은 거 무지 챙기는 촌스러운 구석이 많은 아이 ㅋㅋ) 그런데 참으로 오랜만에 하얀 바탕 앞에서 복잡하던 머리도 같이 새하얘지는 경험을 했다. (고로, 이 일기 정말 힘들게 쓴 일기임 ㅋㅋ) 최근에 모든 종류의 글을 잘 안 썼더니, 온몸에 있는 글쓰기 세포가 없어진 마냥 . 난 말을 하거나 글을 써야 생각이 정리되는 편인데, 쓰다 보니 글이 좀 더 스스로에게 계몽적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나도 김연수작가님처럼 매일 매일 써볼까. 어떤 종류의 글이든. 작가로서가 아니라, 작가가 되기 위해서도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 나는 성실‘할 수도’ 있는 아이니까,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주석 1의 1)
2009년이 지난 이 마당에 자랑을 좀 하자면, 작년에 내가 들은 최고의 찬사는 ‘네가 이렇게 성실한 아인 줄 몰랐어’ 였다. 그것도 두 사람에게나! 아마 그 말을 한 2인은 이걸 보면서 속으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지 ‘그냥 던진 말인데 덥석 물긴, 낄낄’ 하고. 뭐 상관없지. 내가 얼마나 성실한 사람들을 좋아하고 동경하는지 그대들은 모를 수도 있으니까. 원래 누구나의 인생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내 마음 속 깊이 남은 말들은 늘 누군가의 사소한 말들이었으니까. 말한 사람이 기억도 못하는, 혹은 누가 말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그런 말들이 어느 날의 나에겐 굉장히 힘이 되기도 하고 흐트러진 나를 다잡게 하기도 했으니까.

주석 1의 2)
그러므로 쓰라. 재능으로 쓰지 말고, 재능이 생길 때까지 쓰라. 작가로서 쓰지 말고, 작가가 되기 위해서 쓰라. 비난하고 좌절하기 위해서 쓰지 말고, 기뻐하고 만족하기 위해서 쓰라. 고통 없이, 중단 없이,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진 세계 안에서, 지금 당장, 원하는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날마다 쓰라. - 김연수
(간만에 쓰는 일긴데, 내 맘속의 연인 김연수님 언급 안하면 왠지 아쉬울 것 같아서 주석까지 달았는데, 간만에 글 쓰다 보니까 나 요즘 김연수님 글만 너무 편식해서 읽은 티가 난다 ㅋㅋ 이건 다 크리스마스 선물과 새해선물로 책 세권을 출간하셔서 연말연시를 외롭지 않게 해주신 님의 탓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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