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often feel that death is not the enemy of life, but its friend, for it is the knowledge that our years are limited which makes them so precious.—Rabbi Joshua L. Liebman 

책을 읽다가 이 문장을 읽고 삘 충만 하여 쓰기 시작한 글이지만, 위의 문장과는 상관이 있기도, 다소 상관이 없기도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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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기와 관련한 저널을 읽다가 교수님이 질문을 던지셨다. ‘과연 오래 사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가?’ 

많은 분야에서 인간이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다. 병을 없애는 방법을 연구하고, 건강한 상태를 되도록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약을 개발하며 우리를 오래 살지 못하게 하는 적들을 찾아내려 노력한다. 그런데, 과연 ‘사람들이 오래 살 수 있게 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과연 늘 옳고 당연한 것일까? 죽음을 삶의 반대 개념으로 생각하는 현대적 관점이 아니라,  죽음이 ‘삶의 연속’이라는 관점이 지배적이었던 사회에서도 생명연장을 위한 연구와 개발이 이토록 활발할 수 있었을까? 

요즘은 개인적으로 이런 고민들을 한다. 상식적으로 산다는건 어떤걸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이 시대의 상식은 과연 긴 역사와 전 인류의 차원에서 봤을때 과연 ‘상식적’인 것일까. 

최근에는 구제역 이슈를 또 원전 방사능 유출을 마주하는 심정이 또 그랬다. 인간을 위해 땅에 묻어졌던 수백만마리의 가축들은, 사실 인간을 위해 키워지고 있던 게 아니었던가. 인류의 과거와 미래의 긴 역사적 프레임으로 봤을 때, 원자력의 개발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 것일까.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인간들은 어떤 행동을 계속 하는데, 그 행동들이 또 인간들을 위협한다. 과연 무엇이 상식적인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행동인 것일까. 

열세살에도, 여고생 시절에도, 스무살 어느 무렵에도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스물다섯이 되고, 서른이 되고, 직업이 생기고, 결혼을 하고, 아기도 낳고. 이런 나이듦의 과정과 인생 과업을 하나 둘 지나면, 세상사를 어느정도 마스터할 수 있겠지, 그러다 노인이 되면 만고 인생의 진리를 깨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사람을 만나면 만날 수록, 경험이 쌓이면 쌓일 수록, 아는게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내가 마주 하는 세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고, 크고, 깊고, 복잡해진다. 나는 매일 매일 성장하고 있는것 같은데, 내가 알게 되는 세상은 내가 성장하는 속도 보다 더 빠른 속도로 크고 복잡해진다. 그래서 어떤 날은 그 큰 세상속의 내가 너무 작고 초라해보이기도 한다. 그런 날엔 사소한 생각 하나를 갖고 인류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대단한 발견을 한 것 마냥 소리높여 떠들던 어제가, 한달전의 내가, 일년전의 내가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진다. 

세상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다는 생각을 막 하기 시작했을땐, 밑도 끝도 없는 막막함이 찾아들곤 했다. 비유하자면 이런거다. 어렸을 때 커다란 서점에 간적이 있었는데, 서점을 한바퀴 돌다보니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사라지는 거였다. 내가 평생동안 책을 읽는다 쳐도 이 서점에 비치되어 있는 책도 다 못읽을텐데, 그 사이에도 수백, 수천만명의 사람들이 끊임 없이 책을 낼 거라 생각을 하니 도저히 책을 읽고픈 의욕이 안생기는 거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수많은 것들을 둘러싼 수많은 입장, 수많은 이념, 수많은 규칙들, 수많은 문제제기, 수많은 상식, 수많은 주장, 수많은 이론……. 들을 떠올리면 문제해결의 의욕이 불타오르기는 커녕, 그저 아득해지고 마는 것이다.

종종 이런 핑계로 문제를 다른곳으로 돌리곤 한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까지 선다형 질문의 정답을 찾는 시험을 적어도 일년에 네번은(뭐, 고등학교땐 사십번은 넘게 본것 같지만) 봐야하는 교육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되버린 것이라고. 그후로 이어진 대학교와 사회생활에서도 나는 줄곧 하나의 정답 혹은 완벽한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그것이 당연하고 가능하다고 생각해왔던 것 같다. 

그랬던 나이기에, 세상엔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다양한 관점이 있다는 것을, 그에 따라 답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명쾌한 답이 나지 않는 것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답이 나지 않아도 어떤 행동들이 일어나고, 그 행동들이 문제해결을 촉진하기도 지연하기도 한다는 것을. 그런 것들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데는 꽤 오랜시간이 걸렸다. (내가 꽤 많은 사람들로 부터 많이 듣던 칭찬이 생각이 유연하다는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사에 정답이 없다는 것을 격언이나 인생 선배들의 조언으로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받아들인 것은 아마도 최근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다행인건, 언제부터인가 막막하거나 주눅이 들기보단 이런 상황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크고 복잡한 세상에 방랑자처럼 부유하면서, 때로는 부딫히고 상처도 내었다가 또다시 다독이고 아물어 가면서 스스로의 세계를 단단하고 탄탄하게 만들어 나가는 것. 무엇보다, 쉽게 좌절하지도 쉽게 오만하지도 않는것.(자기주문처럼 늘 다짐하는 말이지만, 물론 현실적으로 이게 정말 쉽지는 않다.)  스스로 균형을 잡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삶, 그들의 세계도 찬찬히 들여다 볼 여유를 가지는 것. 

그렇다고 이 커다란 세상에 이토록 작은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상식적으로 살면서 행복하게도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을 찾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요즘은, 정말 분신술을 시도해야 하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자기와 연결을 맺고 있는 작은 사회부터 큰 사회에 이르기 까지 튀지않고 살아가기 위해 사회의 상식을 캐치하고 그에 맞게 상식적으로 살아가는 사회성 충만한 나와,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나, 그리고 어떤 틀에서 정의된 문제를 다루는, 공동의 목표하에 목표지향적으로 일을 해내는 나. 마지막으로 그들 모두와 소통하면서 고민하고 성취하고 반성하고 통합하는 자신감을 담당하는 제 3의 나. 

어쩌면, 정말로 필요한 것인지도 몰라. 자기 분열이 아니라 정말 적절한 분신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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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중 하나, 바람을 피려면 3개의 자아가 필요하다고 한다. 각각의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를 담당하는 자아 그리고 그 둘을 관장하는 제 3의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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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다보니 생각난 또 다른 글. 우리가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정말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이 아니라, 딜레마의 상황속에서 우리가 해야하는 정의로운 것들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이지요. 그런데 이 글의 저자는 그 전에 한가지의 질문이 더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너 왜 정의로우려고 하니? [고전 오디세이] “정의란 무엇인가” 샌델은 묻고 플라톤은 탐구한다:http://bit.ly/hLfQpV

2011년 3월
http://vividynamic.tumblr.com/post/3895822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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