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년 5월엔 천주교에서 진행하는 선택 피정에 다녀와서 큰 은혜를 입고 돌아왔는데, 올해 5월에는 일 때문에 서산 부석사로 템플스테이를 하러 갔다가 '적절하고도' '정신이 바짝드는' 생각거리들을 안고 왔다. 그러고 보면 나는 무신론자인것 같으면서도 모든 종류의 종교에 관심있어 하고 무엇보다도 '종교'라는 것 자체의 커다란 힘을 경이롭게 여긴다.  어찌보면 나는 무종교이면서 다종교이고, 그 어떤 종교에서든 사이비 신자인것 아닐까. 우연인지 몰라도 또다시 5월에 종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2.
노짱 1주기 추모 뉴스들을 딸각거리며 보다가, 서울역과 대한문을 지나며 일년전 그날을 떠올리다가 그 후, 지난 1년에 대해서 돌이켜 봤다. 유난히 햇살이 뜨거웠던 노짱의 영결식날, 나는 1년여의 방황을 끝내고 제 자리로 돌아왔고, 그 이후로는 보다 나 스스로에게, 가족이나 직업, 사회에서의 나의 위치나 역할에 보다 집중했다. 역량을 갖추지 않은 채 세상을 바꾼다는 열망에 불타는 이들 대신에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설적이게도 사회가 진보하려면 진보한 개인이 많아져야한다는 스스로의 결론에 도달했고, 그래서 여러 사회적 이슈에 이리 저리 휘둘리는 대신, 나의 현재를 바로 보고 그 자리에서 스스로 더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금씩 나는 제자리 찾기에 열중했고, 나는 몇몇 일에서 성취감을 얻었고 낭만적이기만 하던 장래희망이 조금은 구체화 되었으며 그럴 수록 예전처럼 외롭거나 허무해 지는 일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3.
그런데, 스물여덟의 5월은 나에게 또 다른 숙제를 던졌다. 그것은 며칠전부터 내 마음을 계속 힘들게 하는 전화한통에서 부터 템플스테이, 주경스님의 글 한구절, 간만에 한 소개팅, 심지어 친구들이 여자친구와의 다툼을 이야기 할때 까지 계속 다른 형태로 던져졌다. '너무 스스로의 세계에 빠지는 것을 경계할 것', 요약하자면 그런 이야기다. 

3-1. 
이상하게도, 요즈음 나는 친구들이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와 다투었던 이야기를 꺼낼 때, 나도 지금 당장 연애를 해야하는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든다. 나와는 전혀 다른 어떤 행성이 나의 행성과 계속 부딫히며 어떤 액티비티를 만들어 주는것. 이왕이면 정말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과 서로의 세계를 조금씩 조금씩 보여주다가, 말로는 도저히 설득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하는 지점을 맞닥뜨리고 그제서야 그것을 그대로 인정할것인지, 조금더 이해하거나 이해시키려 노력할지를 고민하는 그런 과정. 그리고 그 모든것에 노력을 기울이는것. 그런것이 지금의 내게 필요한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한친구가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귀찮은게 아니라 두려운것 아니냐고 물었는데,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행성과 크나큰 접촉사고를 일으켜 큰 소리를 내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커질 수록 노력해야한다는 그 사실이 벌써 까마득 하게 두려운것인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찌되었건, 연애라는 것은 성인 성장의 필수 영양소임엔 틀림이 없다. (내 연애관은 정말 얄미로울 정도로 개인주의적이구나.ㅋ)

3-2.
".... 이심전심이 통하지 않는 겉모양만의 선문답은 하는중에도, 끝나고 나서도 참으로 공허하기 이를데 없다. 그저 자신이 겪은 신체적 변화나 조금 신기한 체험이 대단한 깨달음인줄 알고 점점 강한 집착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대부분 꾸준한 대화를 통해 잘못된 집착과 미련을 털어버리지만, 개중에는 상당기간 방황하며 여기저기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인가를 받으려고 하는 이들도 있다. ..... 깨달음에 대한 지나친 의지와 급한 마음이 이러한 병통을 불러오곤 한다....배우는 사람은 스승과 선배수행자들을 존경하는 마음이 약하고, 먼저 수행한 사람들은 아랫사람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 그래서 각자 자기 자신의 좁은 소견에 파뭍혀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병통이 아무리 깊어가도 자신도 주변사람들도 알수 없는 중증이 되기 쉬운 것이다" - 주경스님

잘생긴 (ㅋㅋ) 주경스님의 법문집을 꺼내어 읽다가 아주 따끔한 구절을 발견했다. 사실은 며칠동안 나를 힘들게 하던 말들과도 일맥 상통한면이 있는 글들. 성공이나 인정의 욕구가 클 때, 내 자신도 모르게 비교의 화법을 쓰거나 비판의 화법을 쓰게 되는데 남들이 그러한 화법을 쓸때 마음이 상하거나 팔짱을 끼고 그의 무례함을 탓하면서도 정작 내 자신이 얼마나 그러한지는 모니터링하기 쉽지 않은 법. 집착과 지나친 의지를 버리는 것도 내겐 쉽지는 않은 일일테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숙제 하나는 명확하게 건졌다. 

3-3.
'불교와 마케팅은 정말 정말 비슷한 구석이 많은 학문이예요'
최근에 같이 일하게 된 Maya님은 학부때 불교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마케팅을 전공한 독특한 학력의 소유자인데 밥을 먹다가 우연히 듣게된 그녀의 이야기가 참 흥미로웠다. 불교나 마케팅이나  '사람에 대한 이해'가 두 학문의 기본 바탕이라는 것이 그녀의 이야기 였다. 그럴싸 하다. 그러고 보니 학문과 일, 종교와 기술, 그외의 많은 영역에서 사람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는 영역이 있기나 할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날 주경스님과의 대화시간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연등축제 외국인모니터링다 친구들과 함께한 자리라 주경스님과 영어로 대화하는 기회를 맞이 했는데, 조금은 수줍게, 더듬 더듬 이야기 하셨지만 그 이야기가 너무 강렬해서 눈물이 찔끔 났다. 
'내가 누군가를 이해 하려고 노력을 하든 그렇지 않든, 세상은 똑같이 흘러갈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우리 주위의 사람들도 크게 변할건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와, 그 누구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 사회의 모습은 분명히 다를것입니다.'

며칠전부터 화가나는 일이 마음을 떠나질 않아 '이해하려 노력할수록 화가 날 때는 어떻게 해야합니까?'라고 물으려 할 즈음에 스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전의 생각, 이전의 관념, 이전의 경험에서 벗어나 눈앞의 사실을 보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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