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베플릭. 질적연구 방법론 1장~3장

1장에서는 질적 연구가 주목을 받게 된 사회적, 학문 역사적 맥락을 짚고 질적 연구의 기본적인 특징을 기술한다. 급속한 사회변화, 다양해진 생활세계 등은 연구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마음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새로운 관점과 방법론을 요구하게 된다. 심리학 연구의 일상생활 관련성 결여의 비판, 현실상황을 이해하는데 있어 양적연구의 한계에 대한 자각은 질적연구가 가진 문제의식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저자는 질적연구가 다음의 네가지 기본적인 특징을 가진다고 보았다. 1) 연구대상의 복잡성에 적절히 개방되어 있는, 연구대상에 적합한 연구 방법의 사용, 2) 연구 대상자를 바라보는 관점의 다양성, 3) 해석의 일부로서, 연구자 자신의 의견 반영, 4) 고정된 이론적, 방법론적 개념에 기초하지 않은 접근 방법의 다양성이 그것이다.

2장에서는 질적 연구의 세 가지 접근 방법에 대해서 다룬다. 첫 번째 이론적 전제는 상징적 상호작용론인데 이 입장에서는 개인이 어떤 현상에 대해 주관적으로 부여하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 두 번째 일상생활 방법론은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행위와 그 산물에 관심이 있는데 이를 통해 사회적 질서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를 볼 수 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구조주의적, 정신분석적 접근인데 이 입장은 심리 사회적 무의식 과정에 관심이 있다. 행위나 의미를 생성하는 심층구조를 재구성함으로서 이해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Flick은 접근방법의 삼각화를 제안한다. 이는 각기 다른 이론적 입장은 하나의 현상에 접근하는 다른 길이며, 접근방법에 따라 밝힐 수 있는 측면에 다르다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므로 접근방법을 서로 조합하거나 보완하여 사용하자는 제안이다.

한편 다양한 이론들 간에는 이러한 차이점 뿐 아니라 공통점도 존재한다. 인식론적 원칙으로서, 내부로부터 현상이나 사건을 ‘이해’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점, 질적 연구의 출발점으로서 비교 혹은 일반화 이전에 개별 사례를 일관성을 가지고 재구성 하는 것, 연구의 기초로서 다양한 수준의 현실 구축, 실증적 자료로서 텍스트화 등의 그것이다.

 3장에서는 질적연구의 실증적 자료로서 기본이 되는 텍스트에 대해 이야기 한다. 연구를 위해 재구성된 텍스트는 현실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가? 텍스트와 현실과의 관계는 어떠한가?가 질문의 출발점이다. 저자는 이해를 인식론적 원칙으로 하는 질적 연구에서, 표현, 연구, 텍스트 등에서 현실이 비춰진다는 사고 방식은 잘못되었으며, 이것이 리쾨리가 말하는 ‘여러 단계의 미메시스적 순환’이라는 사고로 대체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고정된 현실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현실을 산출하는 행위다. 질적 연구과정에서 텍스트가 작성 될 때 텍스트 안의 현실 구축에는 연구대상자에 관한 텍스트의 저자 뿐 아니라 그것을 읽고 해석하는 독자도 관계하고 있으며 이 모든 구성의 폭을 아울러 고찰할 필요가 있다.




안쿵쿵's comments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고 유익했던 부분은 같은 질적 연구라 하더라도 대상을 이해하는 방식에 다양한 수준이 있고, 각기 다른 수준에 따라 밝혀낼 수 있는 현상의 측면들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 점이었다. 아직까지는 구체적인 연구 사례들을 충분히 보지 못했기 때문에 각각의 연구 접근방법의 결과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표현이 되는지 잘 감이 오질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 이 접근법들에 대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연구 사례들을 본다면, 배경지식 없이 읽었던 이전과는 조금 다른 지점들을 읽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아직까지 구체적이고 기술적인 방법론을 학습하지 않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질적 연구방법이라는 것이 구체적인 기술방식이나 명확한 분류법을 가지는 방법론이기 보다는, 관점이나 접근법을 다루는 측면이 더 강하다는 생각이 든다.

  통계로 대표되는 양적방법론의 경우 해석의 차이가 날 수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데이터의 분석 틀이 몇 개로 한정되어 있고, 통계 결과 분석단계에서는 어떤 연구자든 일치된 결과를 쓴다. 하지만 질적 연구에서는 분류틀 자체가 재구성, 재정의 될 수 있고, 여러 연구자가 같은 데이터를 가지고 같은 관점으로 접근을 하더라도 다른 결과를 낼 수 있다. 이러한 특징 때문인지, 이전에는 양적방법론에 비해 질적방법론이 구체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다. 그런데 질적 연구의 몇 가지 이론적 입장들을 읽다 보니, 양적방법론에 비해 질적방법론의 구체성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제와 철학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방법론을 발전시키고 정리하는 방식도 다른 것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저자가 표현, 연구, 텍스트 등에서 현실이 비춰진다는 사고방식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 점. 그렇기 때문에 연구대상자로부터의 1차 텍스트로부터 마지막 연구의 결과 텍스트가 독자들에 의해 일상으로 환원될 때까지의 여러 단계의 스펙트럼을 고찰할 필요성에서 미메시스의 과정을 제안한 것 모두 일리가 있는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그러한 과정을 엄밀하게 거친다고 하더라도 결국 사회과학자들이 볼 수 있는 것은 결국 언어화된 현실 아닌가? 다시 말해 질적 연구의 1차 자료가 텍스트란 것은 현실을 보기 위해서 언어를 도구로 사용한다는 건데, 과연 그 언어라는 도구는 현실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도구인가? 사회과학, 그리고 많은 질적 연구방법들은 언어가 가진 한계를 암묵적으로 전제를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양한 맥락과 텍스트를 고찰 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는 장치들이 있는 것일까?

 


반에서.


태풍덴무가 지나가는 동안 하루에도 몇번씩 비님이 찾아왔다가 사라졌지만 제천에 방문한 토요일은 하늘이 쨍하니 맑았다. 일년만에 청풍호반의 새까만 밤을 마주하고 있자니 지난 여름들의 기억이 새록 새록 떠오른다. 여름밤의 호수, 물빛과 빛, 매미와 바람과 전자악기의 소리. 영화제때마다 호반에 마련되는 이 무대에 아래에 앉아있으면 괜히 감수성가득한 소녀이고픈 마음이다. 


영화제가 2회가 되던해부터 한번도 빠지지 않고 제천을 방문했으니 벌써 5년째. 청풍호반에서의 다섯번(혹은 그이상의) '원 썸머 나잇' 다섯해동안 적어도 일년에 한번은 새까만 여름밤의 감수성 가득한 소녀이고팠던 나. 그래서인지 여기에 앉아 있으면 지나간 여름들의 아프고, 설레고, 흥미진진했던 기억과 그 감정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새삼 아련한 기분이든다. 이십대의 다섯번의 여름을 공유하고 있는 이 호수 어딘가에 내 청춘의 기억들이 숨바꼭질 하듯 숨겨져 있는 느낌이었달까.('청춘'같은말은 낯간지러워서 평생 쓸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호반에 앉아있는 내내 '청춘'이라는 말이 입가에 맴돌았다)


제천시장이 바뀐 후에 영화제 폐지를 언급하는 기사를 인터넷을 통해 수십건은 봤고 그 때마다 6회까지 잘 이어온 이 영화제를 그리 쉽게 없애진 못할거라고 생각해왔었다.  그런데 그날밤엔 진짜 그렇게 되면 너무 슬플것 같다는 생각에 눈물이 찔끔 났다. 



제천에 대한 기억. 


처음 제천에서 영화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땐 제천이 어디쯤 붙어 있는지도 몰랐다.  서울에서 굉장히 멀 것 같다는 느낌만 있었는데 잘만 가면 두어시간이면 갈수있고 기차까지 있다고 했다. 2회때 처음으로 영화제에 방문했다. 큰 기억은 없고 자원봉사하시는 아주머니들이 굉장히 친절했던 기억과 이 작고 작은 도시에서 국제영화제를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재미있게 느껴졌다. 


3회 영화제때 나는 생초보 운전자였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직접 운전을 했는데, 맙소사. 시내에서 청풍호반을 넘어가는 굽이굽이 펼쳐진 그 길을 하루에도 몇번씩 운전을 해야한다는 사실에 얼굴이 새하얘 졌던 기억이 있다.  그치만 그 이후로  베스트드라이버가 되었다는 후문이. 


운전을 하게 되면서 제천영화제에 오는 재미가 한껏 더해졌다. 어떤 해는 제천 시내에서 적어도 한시간은 차를 타고 가야하는 조그만 마을의 진흙축제를 보러 가다가 제천 구석 구석 작고 예쁜 마을이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한번은 멋진 경치를 보며 계속 드라이브를 하다 단양으로 넘어갔다 오기도 하고, 또 한번은 길을 잘못 들었다가, 알프스 같은 풍경을 가진 어떤 길 위에서 함께 갔던 동생과 탄성을 내지르기도 했다. 어떤 해는 제천 맛집 투어를 했다. 그것도, 서울에서 조차 자주 못보는 친구들을 죄다 제천으로 불러서. 올해는 가족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라, 금수산 자락의 한 계곡에서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도 보냈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이제 굳이 제천에 갈일이 없어도 남제천 IC에서 잠깐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곤드레나물밥을 먹곤 다시 가던길을 가기도 한다. 


나는 영화마니아는 아니어서 영화프로그램의 리스트가 크게 중요하진 않다. 새로운 영화를 보는 것 보다 매년 이곳에 온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간혹 선택한 영화가 감명깊었다거나,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출연진에 포함되어 있을 땐 그 재미가 두배, 세배, 다섯배, 열배가 되곤 했다. 약간은 중년의 느낌이 나는 이 작은 동네에 젊은 기운이 그득해 지는것, 일년에 한번씩 고요하고 새까만 호반위에 영사기에서 흘러나오는 불빛과 나뭇잎 부딫히는 소리를 함께 느끼는 흔하지 않은 경험을 하는 것. 그런것들이 매년 8월이면 제천으로 떠나고 싶어 안달이 나게 만들었다. 



제천영화제여, 꿋꿋이 살아남아 다오! 


새로 부임한 시장님의 제천영화제 존폐논의에 대한 발언은 사실 갑작스럽고 황당했다. 

비교적 적은 예산으로 이렇게 잘 해나가고 있는 영화제를 굳이 왜?! 라는 생각과 함께, 왜 다른 곳도 아닌 제천시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하는 물음표. 


다른 것은 몰라도 영화제가 지역에 기여하는 측면 즉 지역 자원 활용과 홍보, 지역 인지도증진 효과와 같은 기준에서 보자면 제천영화제는 지난 6년간 그 어느 영화제보다 큰 성과를 내오던 행사였다고 생각한다.[각주:1] 그도 그럴것이 제천이라는 도시는 작은 날개짓 만으로도 큰 효과를 볼수 있을 만큼 젊은 사람들에게 인지도가 낮은 지역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음악영화', '휴양영화제'라는 영화제의 코드와 컨셉은 거짓말 처럼 제천과 어울렸다. 요즘 말로 씽크로율 100%라 할만큼.


부산에 사는 한 지인이 나에게 이런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처음에 부산에서 영화제를 한다고 할때, 대부분의 부산 시민은 무관심 했다고 봐. 나도 그랬고. 근데 어느날 서울에 사는 친구가 전화와서 얘, 나 부산영화제 보러가는데 넌 안가니? 라고 하는거야. 황당했지. 그친구는 부산사람이면 누구나 가야하는 것 처럼 이야기를 했거든. 근데 전화를 끊고 보니 우쭐 한거야. 가까이 있어 좋은지 몰랐는데 그것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알아준다는 느낌이 들때 드는 그런 으쓱함. 나도 그 때부턴 영화제 기간에 꼭 한번씩은 들러보려고 하지"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잘만든 행사 하나가 어떻게 지역 외부와 내부를 연결시키는지' 또 '어떻게 그런 것들이 지역 주민들에게 자부심이 되는지', '지역의 일에 조금더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는 어찌나 사소하고 우연한 순간에 만들어 지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부산영화제가 그러한 단계까지 가는데 10년이 넘게 걸리는 것을 보면, 어떤 영화제 혹은 행사가 태어나서 유아기, 청소년기를 거쳐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며 성장하고 스스로 이름을 알릴때 까지는 일정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도 느꼈다. 


지난 토요일 내 동생이 제천에 사는 친구에게 '뭐야 원썸머나잇 티켓 매진 되었잖아. 우리 가족 이거 보려고 대구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를 어째' 하며 발을 동동 구르며 문자를 보냈을때,

'우리엄마한테 물어보니까, 며칠전 부터 그거 표 구하기 힘들었대 ^^' 라고 답신을 보내온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도 으쓱 한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부산에 살았다던 나의 지인이 그러했던 것 처럼. 


하지만 어쩌면 보이지 않는것들을 기다리기엔 확신이 없고 조급한 것일까.


이십대때 부터 매년 팔월이면 휴가를 내고 제천에서 휴가를 보내는 나와 나의 친구들이 한방 약초에 관심을 가지는 나이가 되어서까지 제천을 찾아오는 꿈을 꾸는 것은 너무도 낭만적인 나의 바램일 뿐인걸까?! 



*

이 글을 쓰면서도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이렇게 사라져버릴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제는 이제껏 잘 자라왔으니까. 내가 관찰하고 경험한 많은 아이들 중에서도 싹이 좋은 놈이니까.

그리고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열망하고 있으니까. 








  1. 영화제를 평가하는 기준은 다양하다. 영화제라는 것이 복합적 성격과 다양한 기능을 띤 종합적 이벤트라는 점, 지역에서 개최되는 영화제는 영화제 자체가 다양한 이해관계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과 평가의 주체, 평가의 목적과 용도에 따라 그 기준이 상당히 달라질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각 영화제가 지향하는 바, 다루는 내용과 평가의 목적에 따라 평가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으로]

폭염의 7월.

우기의 열대지방처럼 적운이 이쁘게 디스플래이 된 파아란 하늘을 넋놓고 보는 일이 잦아졌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며 '아 하늘이 정말 외국같아'라고 중얼거리다가, 방금 내가 얼마나 바보같은 말을 내뱉은건가 싶어 얼굴이 빨개졌다. (한국 같은 하늘은 어떤걸까 라는 의문이 드는것과 동시에, 이전의 나는 외국에 나가서야 하늘을 보는 사치 혹은 여유를 누렸구나 하는 후회 혹은 부끄러운 기분도 약간 들었다.) 


가끔 일이나 여행 목적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드라이브 하다보면, 의외로 그런 바보같은 말을 자주하게 된다. '아 여기 정말 외국같아'랄지 '어머 여기가 한국이라니' 같은. 가까이에 있는 것일 수록 그에 대한 환상을 가지기가 힘들기 때문에 의외로 가까이에 있는 좋은 풍경들을 놓치기가 십상. 환상이 쉬이 생기지 않는 여행지를 공을 들여 리서치라도 한번 해보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바보같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가 바보같아 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상의 이치가 아닐까 싶다. 


앞서 말한 '환상'이 더해지거나 '비교 가능한 정보'를 동반하는 이방인의 시각을 가지면 무언가에 대해 더 열심히, 더 자세히 분석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게 된다. 때로 이방인의 시각으로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적당히 아름답고, 적당히 책임감 가지고, 조금은 가벼울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하지만 이방인의 시각을 가지고 무엇을 본다는 것은 그 나름의 '기능'과 '매력'이 있다. 


이방인의 시각, 이방인의 시각으로 무언가를 보는것.

최근에 이방인처럼 사는 것, 이방인의 시각을 가지는 것에 대한 생각을 부쩍 많이 했다.  



20%정도는 원주민, 80%정도는 이방인의 시각으로 대구에서 살기.


중고등학교시절의 나를 돌이켜 보면, 나의 목표는 오로지 대구를 떠나는 것이었다. 대구가 특별히 싫거나 가족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라기 보다는 그 어떤 근거도 이유도 없이 대구는 나의 무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우리집'이나 '나의 가족', '친구들'이 아닌 '대구'라는 지역을 떠올리면 이렇다 할 감정, 귀가 솔깃해 지고 금방이라도 군침이 돌 만한 이야깃거리가 내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구'라는 지역은 나의 엄마나 아빠처럼 태어나자마자 이미 주어진 것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까지 학습하거나 경험하는 지역의 범위는 우리 엄마나 아빠의 행동반경, 그들의 정보량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이 지역에서 무엇을 하기 위해 애써 어떤 정보를 찾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다. 맛집에 가려면 엄마 아빠를 따라 가거나, 엄마에게 전화해 물어보는 것이면 되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유독 대구에서만 길을 자주 잃는다. 게다가 아직도 대구의 지도를 펼쳐보면 어딘가 모르게 이해가 안 되는 구석이 많기만 하다. '네비게이션쿵'이라고 까지 불리며 친구들에게 전국방방곡곡의 맛집 정보 서비스를 자발적으로 해주고 있는 나의 입장으로 본다면 내 고향 '대구'는 '네비게이션쿵'의 아킬레스건, 알수없는 오류로 인해 작동이 불가한 지역쯤이 되겠다.   


그랬던 내가, 요즘 대구를 중, 고등학교 때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고 있다. 10여년의 타향살이 후 돌아오니 내가 '이방인의 시각'비슷한 것을 가지게 된 것 같다. 10년 전,'곧 떠날' 혹은 '떠나야만 하는' 대구에서 살았었던 내가 스물 여덟살이 되어 '잠시 살게 될'대구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0년전에는 없었던 '비교 가능한 도시'의 정보도 내겐 있다. 무슨 말장난 같지만, 이것은 내게 놀라운 관점의 차이였다. 


주로 친구를 만나거나 옷을 사는 등 '필요'에 의해 방문하던 동성로거리와 시장통 대신 뒷골목과 샛길에서 허름한 간판의 50년 전통 맛집 같은 것을 발견하는 걷기여행을 가끔 했다.'대구를 떠나려고 준비하는' 학생들 대신에 '대구에서 살기위해' 떠나려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외선생님들의 삶이 보였다. 직접 걷거나 운전하며 지도의 조각 조각을 맞추어 나가는 일은 다른 지역을 여행할 때와 마찬가지로 짜릿하고 재미있다. 이에 더해 이 곳에서는 어린시절의 기억조각들을 맞추는 재미도 한껏 느낄 수 있다.


20%정도는 원주민, 80%정도는 이방인의 시각으로 대구에서 살기. '대구'라는 지역에 대해 생각하기로는 대구를 떠나기 전 20년 보다 최근 6개월동안 생각한 양이 더 많지 않을까. 그리고 확실히 나에겐 최근에 본 대구가 더 매력적이다. (아마 그 20년 동안은 사회과탐구시간이 대구에 대해서 생각하는 유일한 시간 아니었을까. 오히려 어린시절엔 내가 사는 지역보다 멀리 있는 연예인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했겠지. 아이러니컬하지만 자연스럽게도)



작년의 서울과 올해의 서울은 내게 어떻게 다를까


그러고 보면,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서울의 곳곳, 거리의 얼리어답터인양 핫 플레이스들의 골목 골목까지 훤히 알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서울에서 지내는 내내 이방인의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루마블 같은 보드게임을 하듯이 우연히 선택하게 된 어떤 지역에 대해서는 동네주민들이 가는 작은 떡볶이 집까지는 섭렵해야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살았던 나였기에 간혹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 말고는 서울 지리를 잘 모르는 친구들을 서울 촌놈이라고 놀리기도 했었는데.. 그러고 보면 그 친구들은 대구에 오면 대구 촌놈이 되는 나와 같았던 셈이다. 


사실 서울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생각을 했다. 서울 지리에 대해서라면 택시기사나 서울지리를 연구하는 학생을 제외한 일반적인 내 또래 친구들에 비해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구에서 서울을 오가며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경험하는 서울은 내가 알고 있던 서울과 전혀 다른 느낌의 도시였다. 솔직히 말해, 도시가 변해봐야 일 년만에 뭐가 그리 변했겠는가. 그런데 내가 너무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주민'으로 살 때와 '비지니스'를 목적으로 서울을 방문할 때 내가 서울이라는 도시를 이용하는 방식이 너무도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일 년 전엔, 남산 중턱의 조용한 동네에 월세일지언정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는 집이 있었다. 폐차 직전의 차이지만 어디든 나의 구형 액센트를 직접 운전하며 서울의 곳곳에서 아직은 트렌드 세터들에게 덜 발견된 조용한 지역과 카페를 찾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방문객의 입장이 되다 보니, 동인천 급행을 탈 때를 제외하면 거의 타지 않는 일호선 지하철을 하루에도 두 번씩 타야하거나 사람이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광화문, 종로, 신촌, 여의도, 강남고속터미널 등에서 미팅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때의 서울과 지금 내가 이용하는 서울은 같은 서울이지만 너무 다른 느낌이었다. 신촌역을 지나는 2호선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꽂고 생각에 잠긴 듯한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문득, 이 사람들과 나는 같은 서울하늘 아래 살았을지언정, 굉장히 다른 서울을 경험하며 살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서울 하늘 아래에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종류의 서울 경험방식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현기증이 났다. 이것이 메트로폴리탄 서울의 매력이자, 외로움의 원천 같다고 느껴졌달까. 


어찌되었건, 서울이란 도시에서는 십 년 전의 나도, 일 년 전의 나도, 지금의 나도 이방인이다. 이방인이라는 속성은 같지만 성격은 조금씩 다른. 




어찌되었건, 난 기꺼이 이방인이 되기를 선택하고 있다.  


그동안 일을 하면서 한 지역에서 꾸준히 기반을 만들고 지역을 위해 일하는 활동가들을 많이 만났다. 뜻이 좋고 지역에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함께 성장해 나가는 역량있는 활동가들을 만날 때 마다 그들이 정말 대단해보였다. 그 와중에 대구를 떠올리면 마음 한 켠에 부끄러운 마음이 일었다. 


대구에 돌아왔을 때. 내 자신에게 자문해 보았다. 내가 만나왔던 지역 활동가들 처럼 지역에 기반을 두고 일을 해 나갈 자신이 있는가? 내가 하고 싶거나 내가 잘 하는 일인가 혹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를 자문했을 때 결론은 NO!였다. 사람들과 잘 어울려 열정적으로 일을 진행하다가도 어느 순간 팔짱을 끼고 뒤로 조금은 물러나 사람들을 관찰하는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이기에 한 곳에서 우직하게 뜻하는 바를 밀고나가는 일을 하는 것엔 자신이 없었다. 집요하게 공을 몰아 나가 골대를 향해 한방을 쏘는 킥커가 보다는, 이런 저런 시각들을 제시하며 킥커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윙어가 적성에 맞다는 것을 알게 된 탓이기도 하다.


 나는 가끔 가족이나 친구, 직장 동료와의 관계에서 핵심 이해관계자가 아닌 마치 제 3자가 된 것인 양 한발짝 물러서서 내가 속한 집단을 바라보는 일이 잦다. (그래서 가끔 얄미움을 사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어디서든 이방인이 되기를 자처하는 나는, 그냥 그것이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그다지 버리고 싶지도 않은) 나의 성향 혹은 성격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방인이라는 말은 묘하게 외로운 느낌을 팍팍 풍긴다. 실제로 이방인의 위치에 있다는 것은 조금은 안정되지 못하고 종종 외로운 것이다. 그치만 촌스럽게 외로운 이방인으로 사는 신세한탄을 할 수는 없지! ㅋㅋ  오히려 내가 줄곧 생각해오고 있는 것은 이방인의 시각을 가지는 것이 주는 신선함과 크리에이티브같은 것. 그리고 그것이 삶의 많은 영역에서 긍정적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확신같은 것이다. 


 내가 요즘 고민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더 많은 새로운 지역에서 '이방인'이 될 것인가 보다는 정체된 곳에서 어떻게 이방인의 시각을 활용할 수 있는가에 더 가깝다. 내 문제와는 크게 상관없는 것 같은 친구의 말 한마디나, 끼워 맞추기 나름인 점장이의 점궤하나가 내 고민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주듯이. 


일에 있어서도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고 다양한 시각에서 문제를 볼 수 있게 하는 위치 혹은 그러한 시각을 담는 기획 프로젝트 같은 것을 계속 해보고 싶다. 사실 방법론적으로는 조직을 컨설팅 한다거나 어떤 사업의 자문회의를 구성하는 등  이방인의 시각의 강점과 원리를 차용하는 형태가 현재도 많이 있는 것 같다. 뭐 어찌되었건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이방인으로서 원주민 사회의 매력과 긍정적인 면을 발굴해 내고 드러내어 주는 것. 그것을 매력적인 콘텐츠로 만들어 원주민들에게 자긍심을 불어 넣어주는 접근법. 최근에 쓴 연등축제 외국인 방문객 백서에 쓴 표현을 빌자면 원자열 근자래[각주:1] 전략이라고나 할까. 


단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방인으로의 포지셔닝에 스스로 외로워지거나 허무해 지기를 경계할 것. 이방인의 시각을 유지하되, 원주민만큼의 고민과 진정성을 가질 것.    (음 글이 막판이 되니까 교훈적으로 흘러가는군. 역시 난 촌스럽다니까)




  1. 일찌기 공자는 '근자래 원자열'이라 하였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이 찾아 온다는 뜻으로 정치와 관련한 말인데 최근에 축제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가끔 회자되는 말이다. 여기에 쓴 '원자열 근자래'라는 말은 이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인데, 연등축제가 외국인에게는 인지도도 높고 만족도가 높은 반면 내국인들에게는 인지도가 그다지 높지 않을 뿐더러 흥미도가 다소 떨어지는 특징이 있어 외부의 평가를 내국인 홍보에 활용하라는 전략에 붙인 이름이다. (관련 내용은 연등회_연등축제 외국인 방문객 백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발행 : 부처님오신날 봉축위원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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