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얼마전에 '일기쓰기'가 얼마나 훌륭한 교육아이템인지에 대해
이십분동안 설교를 들었는데, 그것이 참 흥미롭고 그럴듯 하다 생각했다.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모두 '오늘부터 일기를 써야지'하고 다짐을 했었고, 나역시 그랬다.
그런데 사실 일기를 쓰는 것이 그리 쉬운일이 아니다.
초등학교 1학년때 부터 훈련받았던 기능을 상실해가는 느낌이랄까.

왜그럴까.
나는 개인적으로 내가 스무살때 썼던 일기들을 좋아했고, 지금도 가끔 읽으며 좋아라 한다.
이제껏 나는 내가 요즘 일기를 잘 쓰지않는 이유를 두고 이렇게 말하길 즐겨했다.
'스무살때는 감성적인 언어를 쓰는것에 익숙했는데, 지금은 연구보고서를 쓰는데 훈련된 건지 그 언어가 잘 안나와요..'라고.
정말 그럴까? 글쎄, 그시절의 글은 어찌보면 더 분석적이다.
어린시절이나 지금이나 내 자신에 대해, 내게 관찰되어 지는 사람들에 대해 분석하는 것을 좋아라 하는 사람이니까.

꼭 글로 남겨져야 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쁜 다이어리에 꼭 삐뚤 빼뚤 글씨를 채우는 것이 일기가 아닐수 있지.

나는 일기를 쓰는것 보다 대화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말을 하면 할수록 생각이 성장해가고 정리되는 느낌이 들어서랄까.

그리고 비밀 일기장 보다는 어떤 누구라도 봐주는 일기를 쓰는 것이 재미있다.
어떤 누군가에게 표현하고 싶어 안달난 사람처럼
네이트온 대화명으로 일기를 쓰기도 한다. 그것도 꽤나 자주.
그러고 보면 어린시절에도 내 일기장을 엄마가 보는것이 당연히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실은 엄마가, 선생님이 이 일기장을 보는것 처럼 일기를 썼던것 같다.
그래서 나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구입한 신윤복이 그린 여인네의 그림이 박혀있는 예쁜 수첩에 일기를 쓰는 것 보다
스무살의 흔적, 싸이월드의 사진첩, 티스토리의 블로그에 일기를 쓰는 것이 더 좋다.

그런데 어쩌면 내가 글쓰기의 장애를 느끼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게 아닐까 생각했다.
얼마전에 대뫙이 '블로그는 나중에'라고 이야기 했던 맥락이 내가 일기를 잘 못쓰는 이유의 맥락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정리안되고, 결론이 없고, 서론-본론-결론 구조를 가지지 못하는 수많은 생각들, 수많은 문장들.
그러고 보면 너무 쉽게 지워진 내 문장들이 너무너무 많겠구나.
그것이 다른 형태의 생각으로 발전하여 또다른 일기에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있을수도 있고
어떤 수많은 생각들은 나의 전의식과 무의식에 고루 퍼져 지금의 내게 영향을 주고 있을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갑자기 아쉬워 진다. 으음.  


2.

정말 재미있는 것이, 일기를 쓰려고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하다보면
원래 쓰려고 했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전혀 새로운 글을 쓰게 된다는 거다.
위에 줄줄이 쓰여 있는 내용이 딱 그렇다.
정말 블로그에 글쓰기 버튼을 누르면 나오는 하얀 백지를 두고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두서없이 글을 쓸때는 손가락이 대화를 하면서 생각을 발전시킨다. 후훗


3.

사실 오늘은 회사에 가지 않았다.
감기가 너무 독해서 오늘쯤은 쉬어줘야 될것 같아 아침에 문자를 보내고 결근을 했다.
그래서 오늘은 좀 색다른 일기의 소재가 많다.

#1. 회사에 안갔는데, 회사에 있을 때 보다 더 많은 일을 한기분. 역시 회사에서 집중을 하는게 쉽진 않다.

#2. 우리동네에 정말 맛있는 밥집이 많다. 언제 한번 이태원2동 주민만 아는 밥집이라는 기사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전에 종우씨와 작은 공간이 기호를 만들어내고 그 기호가 새로운 공간들을 탄생시킨다는 대화를 하며
      카모메식당과 한강로3가의 아키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했는데, 그 이야기와 '안쿵쿵이 이태원2동 밥집을 소비하는 행태'가
      연결이 되면서 혼자 완젼 흥미 진진해졌다.

#3. 집에 하루종일 있어보니 일의 집중도가 높아지는 것은 좋은데, 관찰할 대상이 밸로 없어서 심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어떤 조직이나 매일 만나는 어떤 집단이 있어야 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아.. 나 회사에서 일을 하는 걸까, 심리학적 호기심을 푸는 걸까. 그 둘을 하는 걸까.
      공부를 다시 하게 되면 현장에 가서 경험지를 쓰거나 실험을 계속하는 그런 연구실에 있고프다.

#4. 간만에 우리결혼했어요를 보는데, 황보와 김현중 커플이 너무 예쁜거였다. 김현중같은 남자 처음엔 너무 싫었는데,
      지금은 완전 설레잖아! 그런데 김현중이 좋은 것인지, 우리 개완이랑 현중이 닮아서 그렇게 느껴지는건지 헷갈린다.

#5. 싸이월드 검색창에 김정은 이서진 결별이 계속 뜨는게 마음에 안들었었는데,  어제 누가 나에게 '이거 뭐 완젼 김정은
      이서진 같네'라고 말하고 나서, 김정은을 티비에서 보니까 괜히 그녀와 나를 비교하게 된다. 으음. 힘내자.

#6. 도대체 왜 이 정권은 우리 노간지를 깎아내리질 못해 안달일까. 9시 뉴스의 6꼭지가 김해이야기라는 사실에 좀 충격.
      정말 언론탄압중인걸까. 내가 보기에 그리 중요한 뉴스거리도 아닌데

#7. 방콕 공항 폐쇄, 인도 테러, 파키스탄 상황 악화. 내년에 아시아투어를 계획중이던 안해삼이 완전 울상이다.
      음 그곳에 가든 못가게 되든 온통 관심을 쏟으며 세계 정세를 모니터링하고 있는 지금 부터가 '여행중'이라는 느낌이드네.
      역시 내동생. 멋지다. 넘 우울해 하지말고, 인생은 항상 예측 불가라서 재미있는 거란다.


아.. 감기약을 언능 먹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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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비비다이나미끄 붕붕이가 빨간구두를 신었습니다
한밤중 퇴근길에 집으로 가려면 삼각지에서 우회전 하여 이태원 방향으로 가야하는데,
이틀째 붕붕이가 나를 광화문으로 끌고 왔습니다.
아놔 빨간타이어에 구멍을 내야하는지... 안그래도 요즘 피곤한데 ;;;

글세요.
왜인진 모르겠어요.
대학교 1학년때 운동권 학생회가 동영상 보여주면
구린내 난다고 도망가던 나인데 ㅋㅋ

뭐 그닥 제가 정실장님 처럼 정의실현파는 아닌거 같고,
관찰자의 본능 같은거 아닌가 싶습니다.
시위에 참여한다기 보다 모니터링 한다는 표현이 더 맞는거 같습니다.
(오늘 진영이 '쿵도 나가서 축제성 분석해야하는거 아냐?' 라고 말하던게 생각나네요 ㅋㅋ)

오늘은 좀 많이 훈훈한 기분이 들었어요.
'이명박은 물러가라'란 말보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더 많이 들은것 같아요.

새벽 1시, 오늘의 시위를 접어야 할 시간.
할아버지가 청소년에게, 양복입은 아저씨가 대학생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우리 내일 또 만나요' 라고요.

아주 잠깐 시위현장에 머무르면서 내가 가장 인상깊게 본 장면은 바로 이 장면이예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중절모를 쓴 멋쟁이 할아버지는 올해 72세라고 하시네요.
지난주 토요일 시위에 나왔다가 눈앞에서 우리 자식들이 제압당하는 걸 보고
오늘 또 나오셨답니다.
저~ 앞에서 시위를 하는 청년들을 지켜보며,
아.. 우리 자식들이 저렇게들 하는데 경찰들 정말 너무하네.. 하시며
걱정어린 눈빛을 보이시더군요. 그러더니
나와 함께 서있던 양복맨들을 향해 한마디 하십니다.

"우리 늙은이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지만,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다 싶어.
여기 젊은이들.. 자네들이 수고좀 해줘"
 
양복맨들은 걱정입니다. 날씨가 쌀쌀한데 할아버지가 감기에 걸리시면 어쩌나..
오늘 저녁부터 나오셨다는데 다리아프시면 어쩌나..
돗자리 재질로 된 방석을 급구하여 할아버지께 드렸지만, 할아버지는 괜찮으시답니다. 이것쯤이야.. 하시며

할아버지는 거리로 나온 젊은이들이 너무 고맙다 하십니다.
그것을 듣던 양복맨 1은 '처음에 나와준 우리 여중생 들이 고맙지요'
옆에있던 양복맨 2는 '지금 열심히 싸워주는 대학생들이 고맙지요' 하며 대화를 시작합니다.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코끝이 찡했습니다.

빨간모자 할아버지의 등장은 그중에서도 하일라이트였습니다.
나에겐 그분도 할아버지인데,  중절모 할아버지께 나이를 여쭙더니
대뜸 "아이고 아버님" 하며 손을 덥썩 잡습니다.
그리고는 몇초 지나지 않아 그 자리는 정치 토론의 장이 되었습니다.
빨간모자 할아버지는 술을 드셨는지, 혀가 꼬부러진 목소리로 이야기 하셨지만
모두들 그 이야기에 대해 때론 공감하고 때론 반박합니다.
60, 70대 할아버지와, 30,40대 양복맨 그리고 옵저버 처럼 서서 경청하는 20대의 내가 함께 있습니다.


촛불시위? 내가 이것에 찬성인지 반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안쿵이 항상 그래왔듯이 시위현장에 있어도 회색분자같은 성향은 버릴수 없네요.
인터넷에 떠도는 글에 막 공감을 하다가도, 문득 시위를 통해 내가 얻으려는게 뭐지? 하는
기초적인 질문에 부딫히기도 하고,
실제로 지금의 촛불시위는 뚜렷하고도 현실적인 목표가 없다는 사실에 답답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왠지,
나의 비비다이나믹 붕붕이는 정말 빨간구두를 신은것 처럼
자주 나를 이곳에 내려놓을 것 같습니다.

처음엔 심하게 사회문제에 관심을 안가지던 내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고,
문화기획자로서는, 온오프라인의 무차별 참여형 문화기획에 KO당한 기분을 설명하고 싶었고.
조금더 나는 적극적으로 이 축제를 즐기고 공부하고 싶어요.

정말 이렇게 철저한 개인적인 이유때문에라도.
비비다이나믹 붕붕이가 신은 빨간 구두를 억지로 벗기고 싶진 않네요.


* 지금 24시간 탐앤탐스에서 맥북켜놓고 된장녀 놀이 하고있습니다.
이밤중에도 사람이 많네요. 이따 새벽 5시 부터 신호등 시위 할거랍니다.
아놔 전 할일이 많아 참여를 못할듯 ^^
유료주차장 직원 출근하기 전에 붕붕이 빼야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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