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도시 서울로 돌아가 살 생각을 하면 벌써 숨이 턱턱 막힌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집을 알아보다가는 눈물을 주룩 주룩 흘릴 뻔한 정도.
그럴 때 마다, '
공부보단 시집이 먼저' 라는 아빠 말을 들을껄 하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말로만이었지만, 내가 올해 '결혼'이란 화두에 유난히 집착했던 이유에대해
롤랑바르트님하께서 약 3-40여년 전에 언급하신 이야기.


...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그 안착한 사람들을 왜 나는 부러워 하는 걸까? 그들을 보면서 나는 무엇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것은 '꿈'이나 '목가적인 사랑' '결합'은 아닐 것이다. 안착한 사람들은 그들의 시스템에 대해 많은 불평을 하고 있고, 또 결합에의 꿈은 다른 문형을 이루기에, 아니 내가 시스템에서 환각하는 것은 아주 조촐한 것이다. (그것은 화려하지 않아 더욱 역설적이다). 나는 다만 하나의 구조( structure)를 바라고 원할 뿐이다. 물론 구조의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구조는 살만한 것이며, 바로 거기에 구조의 가장 적절한 정의가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 것 속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다. 불평할 수도 있고 지속할 수도 있다. 내가 감내하는 구조의 의미를 거부할 수도 있으며, 그 일상적인 몇몇 파편들(습관, 조그만 즐거움, 안정감, 견딜 수 있는 것들, 일시적인 긴장감)을 과히 불쾌하지 않게 통과할 수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이런 시스템의 지속에 대해(바로 이 점이 시스템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든다) 어떤 변태적인 취향도 가질 수 있다. 다니엘 르 슬리트는 기둥 꼭대기에서도 잘 살았다. 그는 기둥으로 부터 하나의 구조를 만들어 낸 것이다(물론 어려운 일이긴 하였지만) ...

...구조들의 힘, 바로 그것이 우리가 구조에서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 롤랑바르트, 사랑의 단상 中 "모든 안착한 사람들"


아마 롤랑바르트님하가 구조주의에 심취하셨을때 쓴 글일텐데,
그렇게 치면 내가 큰 학교에가서 공부를 하려고 하는 것도 '안착하고싶은 욕구'
혹은 '구조들의 힘'과 별개의 것이라고 말할 순 없는 문제인듯 ㅋㅋㅋ



(아이돌가수에 빠진 십대 소녀같은 고백이긴 하지만)
김연수님의 문장을 읽을 때면, 늘 연애편지를 읽는 느낌이다. 
그리고 (과한 의미부여인지, 자의적 해석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가끔씩 말도 안되게 엄청난 위로를 받게된다. 

그러니까, 오늘이 그런날이다. 말도안되게 엄청난, 의외의 위로를 받은. 
읽고 또 읽어도 좋은 김연수님의 자전소설 '뉴욕제과점' 
다섯번도 더 읽은 이 단편소설이 오늘따라 가슴속에 툭 하고 와닿았다. 


... 동봉한 편지에 아버지는 "나는 너를 믿는다. 네 소신껏 희망을 갖고 밀고 나가거라. 어짜피 인생이란 그런것이 아니겠냐" 라고 써놓은 뒤, '아니겠냐'의 '겠'과 '냐' 사이에 'V자'를 그려놓고 '느'를 부기했다. 그 편지를 읽을 때마다 나는 '아니겠냐'라고 쓴 뒤에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중간에 '느'자를 삽입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 아이가 생긴뒤에야 나는 그게 얼마나 숭고한 일인지 알게 됐다. ...

... 내게 보낸 편지에서 "어짜피 인생이란 그런것이 아니겠느냐"라고 아버지는 쓰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니겠냐'와 '아니겠느냐'가 어떻게 다른지 나는 아직도 모르고 있다. 세월이 흘러서 나도 내 아이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한 편지를 쓸 때쯤이면 그 차이를 알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나도 왜 아이는 자라 어른이 되는지, 왜 세상의 모든 불빛은 결국 풀풀풀 반짝이면서 멀어지는지, 왜 모든것은 기억 속에서만 영원한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내 다음 아이들이 자라게 되면,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그 정도의 짧은 시간만 흐르고 나면 나도 '아니겠냐'와 '아니겠느냐'의 차이를 알게 될 것이다. ... 

... 어느 날인가 나는 문득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는 괴로운 일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는 늘 누군가 내가 알던 사람이 죽을 것이고 내가 알던 거리가 바뀔 것이고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떠나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문득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러면서 자꾸만 내안에 간직한 불빛들을 하나둘 꺼내보는 일이 잦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사탕을 넣어둔 유리항아리 뚜껑을 자꾸만 열어대는 아이처럼 나는 빤히 보이는 그 불빛들이 그리워 자꾸만 과거 속으로 내달았다. 추억 속에서 조금씩 밝혀지는 그 불빛들의 중심에는 뉴욕제과점이 늘 존재한다.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어른이 되는 동안, 뉴욕제과점이 있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뉴욕제과점이 내게 만들어준 추억으로 나는 살아가는 셈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뭔가가 나를 살아가게 한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 다음에 나는 깨달았다.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 괴로운 일만 남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도 누군가에게 내가 없어진 뒤에도 오랫동안 위안이 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삶에서 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그저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이세상에서 사라졌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내안에 고스란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깨닫게 됐다. 그 즈음 내게는 아이가 생겼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아주 오랫동안 그 아이가 나 없는 세상을 살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
 
- 김연수, 뉴욕제과점 중에서.




반짝 반짝 빛나던, 고요함을 간직한채 여전히 빛나고 있는 그 시간들이 새삼 소중해 졌다. 
이문세 아저씨의 노랫말을 조금 응용하자면,
그 빛들은 빛나는 대로 내버려 두는게 조금은 어른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이상 반짝이지 않지만, 그 빛은 내안에 고스란히 존재하고 있으니까. 
그 시간들이,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하니까. 







김연수는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작가의 말에서,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된다고 굳이 적어놓았다. 그런데 웬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읽으면서 나는 주인공 남자가 나를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내내 생각했다. 그 이유는 바로, 완전히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요즘 누군가가 나를 완전히 이해할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기대인지 깨닫고 있다. 그치만, 사람이라서 또 이렇게 쉽게 생각해 버리는 나를 또 마주하게된다.) 

그는 정말 내 마음을 알것 같았다. 2008년 봄부터 2009년 5월 까지 이어진 나의 길고긴 사춘기에 대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는 나를 이해할 것이 분명하다고 느껴졌다. 
다른 세대, 분명 다른 시간과 계기였지만 1980년대의 그도, 2008년의 나도 그제껏 믿어왔던 '세계'가 바뀌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챌 그 즈음엔 영문도 모른채 방황을 했다.

그제야 나는 그즈음 내가 공들여 지어온 집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반석이라고 믿었던 모든것들이 한낱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 순간 알게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자각은 그해 6월, 나를 향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밀려들던 우울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나만의 지극히 개인적인 우울이 아니라 한시대 전체가 느끼던 거대한 우울이었던 듯 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 그 우울은 너무나 컸다)로 부터 나를 구해냈다. 나를 구한건 '자기 자신이 되어라' 라는 마지막 문장이었다. 인생은 자기 자신이 지배하는 것이다. 너의 인생을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 무엇보다도 네가 선출한 지도자에게는 맡기지 말라. 자기 자신이 되어라 - 123p

주인공이 공들여 지어온 집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시점부터, 마지막장에 이를때 까지 책속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그 이야기들과는 상관 없이 주인공의 모습이 꼭 2008년 4월의 어느 새벽에서 부터  2009년의 5월, 햇살이 정말 뜨거웠던 그날의 서울역 앞에 서있던 내모습과 너무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간혹 쉽게 이해가 안되거나 공감이 안되는 부분을 읽을때면 너무 안달이 났다.

잘가. 안녕. 나는 막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안녕이라고. 지금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1991년의 10월 어느날 해질무렵, 나는 한때 내가 살았던 어떤 뜨거운 시절에게 작별인사를 던진것이라고. - 389p


그것은 시대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개인의 문제였던것이다.
그래서 나는 1980년대의 그의 방황에 공감했고, 그의 이야기에 2008년의 내가 새삼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을테지.  그 시대에도, 2008년에도, 2010년에도 수많은 개인의 삶은 존재하고 그들이 수많은 상실과 좌절속에서 정리해 낸 수백, 수만개의 이야기들은 각자의 세계에서 일관성을 가지는 어떤 것으로 존재한다.실제의 삶이 그러했든, 그러하지 않았든.  (우리의 보통의 삶은 일관성을 가질 확률이 극히 드문데도 말이다) 

사기꾼이자 협잡꾼, 광주의 랭보 이길용이자 안기부의 프락치 강시우였던 그 남자에 대해 이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지만, 어쩌면 그건 우리가 그에대해 알아낼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죽지않는 한 그는 살아남기 위해 시시각각 열망할테고, 그 열망이 다시 그를 치욕스럽되 패배하지 않는 인간으로 살아남게 할테니까 말이다. - 375p

나의 길고긴 사춘기가 끝나갈 즈음, 시대나 세대의 문제에서 개개인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생각을 하기 시작 하고서야 그간 막연한 동경에서 비롯된 386들에 대한 영문모를 미운감정이 조금씩 해소되고 있다고 느꼈다. 386 혹은 '그 시절', 혹은 그들이 우리세대에 가지는 우려나 반감 등에 대한 이해를 돕는 것으로 치자면, 김연수의 소설은 그 어떤 세대론 보다 설득력 있고 촌스럽지가 않다. 그의 글은 굳이 따지자면 사회학적이기 보단 심리학적이고, 역사와 같이 큰 것을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역사 속의 개인을, 끝이 어딘지 모를 개인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 한다. 바로 그 부분이 무릎을 탁 치며 빵 터질듯한 가슴으로 책장을 넘길 수 밖에 없는 이유. 어쩌면 딱 나의 취향인것인지도. (요즘 나의 대화에서 김연수 작가의 이야기가 빠지면 도대체 대화가 안되는데, 그제는 심지어 아엘츠 스피킹 스터디 시간에 신나서 김연수라는 사람을 요즘 얼마나 사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침을 튀겨가며 이야기했다. 그가 결혼을 했고, 딸마저 있다는 소식은 최근 들은 이야기 중에 가장 슬픈것이었다 ㅋㅋ)

인간이 환상의 희생자가 된다거나, 과거의 것이 새로운 것 보다 더 강하다면, 혹은 '진실'이 자기편이 아니라 자기와 대립하고 있다면, 새로운 인간의 시대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식하거나 인식하다고 믿는다면, 그 실망이야 이루 말할 수 없다. 상황은 이전만큼, 아니 이전보다 훨씬 더 나쁘다. 과거는 꿈을 위해 온갖것을 희생하고 과감하게 전진했던 사람들을 기습하고 복수한다. ... 최선을 다 했기에 허탈감이, 아마도 그들은 너무나 희망했기에 너무 절망하게 된다. 늪에 빠지지 않은 자들은 더 나쁜 구렁으로 빠져든다. 꿈을 위해 뛰어다녔던 사람들이 이제 그 꿈에 맞서서 뛰어다닌다. 좌절당한 개혁자 보다 더 무자비한 반동분자는 없다. 길들여진 코끼리를 제외하자면 누가 야생코끼리에 맞설수 있겠는가. 그러나 실망한 사람들도 새로운 시대, 거대한 변혁의 시대에 살고 있다. 다만 그들은 새로운 시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할 뿐이다. -373p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김연수 (문학동네,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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