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의 7월.

우기의 열대지방처럼 적운이 이쁘게 디스플래이 된 파아란 하늘을 넋놓고 보는 일이 잦아졌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며 '아 하늘이 정말 외국같아'라고 중얼거리다가, 방금 내가 얼마나 바보같은 말을 내뱉은건가 싶어 얼굴이 빨개졌다. (한국 같은 하늘은 어떤걸까 라는 의문이 드는것과 동시에, 이전의 나는 외국에 나가서야 하늘을 보는 사치 혹은 여유를 누렸구나 하는 후회 혹은 부끄러운 기분도 약간 들었다.) 


가끔 일이나 여행 목적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드라이브 하다보면, 의외로 그런 바보같은 말을 자주하게 된다. '아 여기 정말 외국같아'랄지 '어머 여기가 한국이라니' 같은. 가까이에 있는 것일 수록 그에 대한 환상을 가지기가 힘들기 때문에 의외로 가까이에 있는 좋은 풍경들을 놓치기가 십상. 환상이 쉬이 생기지 않는 여행지를 공을 들여 리서치라도 한번 해보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바보같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가 바보같아 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상의 이치가 아닐까 싶다. 


앞서 말한 '환상'이 더해지거나 '비교 가능한 정보'를 동반하는 이방인의 시각을 가지면 무언가에 대해 더 열심히, 더 자세히 분석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게 된다. 때로 이방인의 시각으로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적당히 아름답고, 적당히 책임감 가지고, 조금은 가벼울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하지만 이방인의 시각을 가지고 무엇을 본다는 것은 그 나름의 '기능'과 '매력'이 있다. 


이방인의 시각, 이방인의 시각으로 무언가를 보는것.

최근에 이방인처럼 사는 것, 이방인의 시각을 가지는 것에 대한 생각을 부쩍 많이 했다.  



20%정도는 원주민, 80%정도는 이방인의 시각으로 대구에서 살기.


중고등학교시절의 나를 돌이켜 보면, 나의 목표는 오로지 대구를 떠나는 것이었다. 대구가 특별히 싫거나 가족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라기 보다는 그 어떤 근거도 이유도 없이 대구는 나의 무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우리집'이나 '나의 가족', '친구들'이 아닌 '대구'라는 지역을 떠올리면 이렇다 할 감정, 귀가 솔깃해 지고 금방이라도 군침이 돌 만한 이야깃거리가 내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구'라는 지역은 나의 엄마나 아빠처럼 태어나자마자 이미 주어진 것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까지 학습하거나 경험하는 지역의 범위는 우리 엄마나 아빠의 행동반경, 그들의 정보량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이 지역에서 무엇을 하기 위해 애써 어떤 정보를 찾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다. 맛집에 가려면 엄마 아빠를 따라 가거나, 엄마에게 전화해 물어보는 것이면 되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유독 대구에서만 길을 자주 잃는다. 게다가 아직도 대구의 지도를 펼쳐보면 어딘가 모르게 이해가 안 되는 구석이 많기만 하다. '네비게이션쿵'이라고 까지 불리며 친구들에게 전국방방곡곡의 맛집 정보 서비스를 자발적으로 해주고 있는 나의 입장으로 본다면 내 고향 '대구'는 '네비게이션쿵'의 아킬레스건, 알수없는 오류로 인해 작동이 불가한 지역쯤이 되겠다.   


그랬던 내가, 요즘 대구를 중, 고등학교 때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고 있다. 10여년의 타향살이 후 돌아오니 내가 '이방인의 시각'비슷한 것을 가지게 된 것 같다. 10년 전,'곧 떠날' 혹은 '떠나야만 하는' 대구에서 살았었던 내가 스물 여덟살이 되어 '잠시 살게 될'대구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0년전에는 없었던 '비교 가능한 도시'의 정보도 내겐 있다. 무슨 말장난 같지만, 이것은 내게 놀라운 관점의 차이였다. 


주로 친구를 만나거나 옷을 사는 등 '필요'에 의해 방문하던 동성로거리와 시장통 대신 뒷골목과 샛길에서 허름한 간판의 50년 전통 맛집 같은 것을 발견하는 걷기여행을 가끔 했다.'대구를 떠나려고 준비하는' 학생들 대신에 '대구에서 살기위해' 떠나려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외선생님들의 삶이 보였다. 직접 걷거나 운전하며 지도의 조각 조각을 맞추어 나가는 일은 다른 지역을 여행할 때와 마찬가지로 짜릿하고 재미있다. 이에 더해 이 곳에서는 어린시절의 기억조각들을 맞추는 재미도 한껏 느낄 수 있다.


20%정도는 원주민, 80%정도는 이방인의 시각으로 대구에서 살기. '대구'라는 지역에 대해 생각하기로는 대구를 떠나기 전 20년 보다 최근 6개월동안 생각한 양이 더 많지 않을까. 그리고 확실히 나에겐 최근에 본 대구가 더 매력적이다. (아마 그 20년 동안은 사회과탐구시간이 대구에 대해서 생각하는 유일한 시간 아니었을까. 오히려 어린시절엔 내가 사는 지역보다 멀리 있는 연예인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했겠지. 아이러니컬하지만 자연스럽게도)



작년의 서울과 올해의 서울은 내게 어떻게 다를까


그러고 보면,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서울의 곳곳, 거리의 얼리어답터인양 핫 플레이스들의 골목 골목까지 훤히 알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서울에서 지내는 내내 이방인의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루마블 같은 보드게임을 하듯이 우연히 선택하게 된 어떤 지역에 대해서는 동네주민들이 가는 작은 떡볶이 집까지는 섭렵해야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살았던 나였기에 간혹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 말고는 서울 지리를 잘 모르는 친구들을 서울 촌놈이라고 놀리기도 했었는데.. 그러고 보면 그 친구들은 대구에 오면 대구 촌놈이 되는 나와 같았던 셈이다. 


사실 서울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생각을 했다. 서울 지리에 대해서라면 택시기사나 서울지리를 연구하는 학생을 제외한 일반적인 내 또래 친구들에 비해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구에서 서울을 오가며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경험하는 서울은 내가 알고 있던 서울과 전혀 다른 느낌의 도시였다. 솔직히 말해, 도시가 변해봐야 일 년만에 뭐가 그리 변했겠는가. 그런데 내가 너무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주민'으로 살 때와 '비지니스'를 목적으로 서울을 방문할 때 내가 서울이라는 도시를 이용하는 방식이 너무도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일 년 전엔, 남산 중턱의 조용한 동네에 월세일지언정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는 집이 있었다. 폐차 직전의 차이지만 어디든 나의 구형 액센트를 직접 운전하며 서울의 곳곳에서 아직은 트렌드 세터들에게 덜 발견된 조용한 지역과 카페를 찾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방문객의 입장이 되다 보니, 동인천 급행을 탈 때를 제외하면 거의 타지 않는 일호선 지하철을 하루에도 두 번씩 타야하거나 사람이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광화문, 종로, 신촌, 여의도, 강남고속터미널 등에서 미팅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때의 서울과 지금 내가 이용하는 서울은 같은 서울이지만 너무 다른 느낌이었다. 신촌역을 지나는 2호선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꽂고 생각에 잠긴 듯한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문득, 이 사람들과 나는 같은 서울하늘 아래 살았을지언정, 굉장히 다른 서울을 경험하며 살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서울 하늘 아래에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종류의 서울 경험방식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현기증이 났다. 이것이 메트로폴리탄 서울의 매력이자, 외로움의 원천 같다고 느껴졌달까. 


어찌되었건, 서울이란 도시에서는 십 년 전의 나도, 일 년 전의 나도, 지금의 나도 이방인이다. 이방인이라는 속성은 같지만 성격은 조금씩 다른. 




어찌되었건, 난 기꺼이 이방인이 되기를 선택하고 있다.  


그동안 일을 하면서 한 지역에서 꾸준히 기반을 만들고 지역을 위해 일하는 활동가들을 많이 만났다. 뜻이 좋고 지역에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함께 성장해 나가는 역량있는 활동가들을 만날 때 마다 그들이 정말 대단해보였다. 그 와중에 대구를 떠올리면 마음 한 켠에 부끄러운 마음이 일었다. 


대구에 돌아왔을 때. 내 자신에게 자문해 보았다. 내가 만나왔던 지역 활동가들 처럼 지역에 기반을 두고 일을 해 나갈 자신이 있는가? 내가 하고 싶거나 내가 잘 하는 일인가 혹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를 자문했을 때 결론은 NO!였다. 사람들과 잘 어울려 열정적으로 일을 진행하다가도 어느 순간 팔짱을 끼고 뒤로 조금은 물러나 사람들을 관찰하는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이기에 한 곳에서 우직하게 뜻하는 바를 밀고나가는 일을 하는 것엔 자신이 없었다. 집요하게 공을 몰아 나가 골대를 향해 한방을 쏘는 킥커가 보다는, 이런 저런 시각들을 제시하며 킥커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윙어가 적성에 맞다는 것을 알게 된 탓이기도 하다.


 나는 가끔 가족이나 친구, 직장 동료와의 관계에서 핵심 이해관계자가 아닌 마치 제 3자가 된 것인 양 한발짝 물러서서 내가 속한 집단을 바라보는 일이 잦다. (그래서 가끔 얄미움을 사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어디서든 이방인이 되기를 자처하는 나는, 그냥 그것이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그다지 버리고 싶지도 않은) 나의 성향 혹은 성격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방인이라는 말은 묘하게 외로운 느낌을 팍팍 풍긴다. 실제로 이방인의 위치에 있다는 것은 조금은 안정되지 못하고 종종 외로운 것이다. 그치만 촌스럽게 외로운 이방인으로 사는 신세한탄을 할 수는 없지! ㅋㅋ  오히려 내가 줄곧 생각해오고 있는 것은 이방인의 시각을 가지는 것이 주는 신선함과 크리에이티브같은 것. 그리고 그것이 삶의 많은 영역에서 긍정적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확신같은 것이다. 


 내가 요즘 고민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더 많은 새로운 지역에서 '이방인'이 될 것인가 보다는 정체된 곳에서 어떻게 이방인의 시각을 활용할 수 있는가에 더 가깝다. 내 문제와는 크게 상관없는 것 같은 친구의 말 한마디나, 끼워 맞추기 나름인 점장이의 점궤하나가 내 고민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주듯이. 


일에 있어서도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고 다양한 시각에서 문제를 볼 수 있게 하는 위치 혹은 그러한 시각을 담는 기획 프로젝트 같은 것을 계속 해보고 싶다. 사실 방법론적으로는 조직을 컨설팅 한다거나 어떤 사업의 자문회의를 구성하는 등  이방인의 시각의 강점과 원리를 차용하는 형태가 현재도 많이 있는 것 같다. 뭐 어찌되었건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이방인으로서 원주민 사회의 매력과 긍정적인 면을 발굴해 내고 드러내어 주는 것. 그것을 매력적인 콘텐츠로 만들어 원주민들에게 자긍심을 불어 넣어주는 접근법. 최근에 쓴 연등축제 외국인 방문객 백서에 쓴 표현을 빌자면 원자열 근자래[각주:1] 전략이라고나 할까. 


단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방인으로의 포지셔닝에 스스로 외로워지거나 허무해 지기를 경계할 것. 이방인의 시각을 유지하되, 원주민만큼의 고민과 진정성을 가질 것.    (음 글이 막판이 되니까 교훈적으로 흘러가는군. 역시 난 촌스럽다니까)




  1. 일찌기 공자는 '근자래 원자열'이라 하였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이 찾아 온다는 뜻으로 정치와 관련한 말인데 최근에 축제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가끔 회자되는 말이다. 여기에 쓴 '원자열 근자래'라는 말은 이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인데, 연등축제가 외국인에게는 인지도도 높고 만족도가 높은 반면 내국인들에게는 인지도가 그다지 높지 않을 뿐더러 흥미도가 다소 떨어지는 특징이 있어 외부의 평가를 내국인 홍보에 활용하라는 전략에 붙인 이름이다. (관련 내용은 연등회_연등축제 외국인 방문객 백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발행 : 부처님오신날 봉축위원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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