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즘 #1주1책이 나름 겨울방학 활력소인데, 이번주 책은 프롬의 사랑의 기술. 일단 유명한 책들이 늘 그렇듯 예상을 아주 그럴듯 하게 빗나가는 내용이었고, 단번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으나, 전반적으로 매우 공감이 가는 내용. 그렇지만 오늘따라 토론은 너무너무 힘들었다. OTL




2.

이 책을 읽다보면, ‘프롬의 시각에 빗대어 볼때 나는 도저히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기는 힘들겠구나, 그러면 나는 그가 말하는 '사랑'을 하지 못하는 건가.’ 하는 의문이 아니 생길 수 없다.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걸리는 자기수양의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인데, 그 마저도 프롬은 자본주의적 원리가 만연한 곳에서 그게 가능할 수 있을까에 대해 다소 자신없게 얼버무린다. 마치 이건 김연수옵하가 언젠가 언급했던, '소설가가 되려면 먼저 인간이 되어라.'라는 충고와 비슷하달까. 그렇다면 김연수 옵하가 그 고민을 해결한 방법을 적용하면 가능할수도 있겠다. 그 옵하가 '일단 썼던것’ 처럼, 나도 '일단 사랑'하면 된다. 정성을 들여서 사랑하다보면 어느날 그 경지에 도달할지도 모르고,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뭔가 다른 내가 되어 있겠지. 






3.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신에대한 사랑을 언급한 부분이었는데, 이 부분은 처음 읽기 시작할 땐 매우 생뚱맞았고, 반정도 읽었을 땐 '아… 뭔 개소리야…’ 였지만, 역설적 철학과 동양 사상이 등장할때 쯤 부터 무릎을 탁치며 읽다가, 앞뒤를 오가며 이 부분을 몇 번을 다시 읽었다. 이해가 안되는게 너무 약이올라서! 아직 다 이해한것은 아니지만, 이 역설적 논리학을 이해하는 것이, 이 책 전체에 걸쳐 프롬이 주장하는 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고의 기반이라는 느낌적 느낌 정도는 스치고 갔다. 

*

우리는 사고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는 알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알면서도 알지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최고의 '각성'이고, 모르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병이다. 최고의 신은 명명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철학의 귀결에 지나지 않는다. 궁극적 실재, 궁극적 일자는 언어와 사고로 파악할 수 없다. p. 102


사고의 세계는 역설에 사로잡혀 있다. 세계를 궁극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고가 아니라 행위에, 곧 일체성의 경험에 있다. 이렇게 해서 역설적 논리학에서는 신에대한 사랑은 사고를 통한 신에 대한 지식이거나, 인간의 신에 대한 사랑에 관한 사상이 아니라 신과의 일체성을 경험하는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러한 사상은 올바른 생활방식을 강조하게 된다. 생활 전체, 사소하지만 중요한 온갖 행동은 신에 대한 지식에 바쳐지지만 올바른 사고에 의한 지식이 아니라 올바른 행위에 의한 지식에 바쳐진다. 이 점은 동양의 종교에서 명백히 볼 수 있다. p.105




역설적 논리학의 관점에서 강조점은 사고가 아니라 행위에 놓인다…..올바른 사고가 궁극적 진리도, 구제에 이르는 길도 아니라면, 사고를 통해 다른 공식에 도달한 다른 사람들과 싸울 까닭은 없다. 이러한 관용은 어둠속에서 코끼리에 대해 말하라는 요구를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 역설적 관점은 교의나 과학의 발달 보다 인간개조를 강조하게 되었다. 인도, 중국 및 신비주의 관점에서 인간의 종교적 과제는 올바르게 사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고, 집중적인 명상 행위를 통해 일자와 일체가 되는 것이다. p106  (서양사상의 주요흐름은 이와 반대를 참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사고를 중심에 두었다. 이것이 교의와 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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