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의 7월.

우기의 열대지방처럼 적운이 이쁘게 디스플래이 된 파아란 하늘을 넋놓고 보는 일이 잦아졌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며 '아 하늘이 정말 외국같아'라고 중얼거리다가, 방금 내가 얼마나 바보같은 말을 내뱉은건가 싶어 얼굴이 빨개졌다. (한국 같은 하늘은 어떤걸까 라는 의문이 드는것과 동시에, 이전의 나는 외국에 나가서야 하늘을 보는 사치 혹은 여유를 누렸구나 하는 후회 혹은 부끄러운 기분도 약간 들었다.) 


가끔 일이나 여행 목적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드라이브 하다보면, 의외로 그런 바보같은 말을 자주하게 된다. '아 여기 정말 외국같아'랄지 '어머 여기가 한국이라니' 같은. 가까이에 있는 것일 수록 그에 대한 환상을 가지기가 힘들기 때문에 의외로 가까이에 있는 좋은 풍경들을 놓치기가 십상. 환상이 쉬이 생기지 않는 여행지를 공을 들여 리서치라도 한번 해보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모두가 바보같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가 바보같아 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상의 이치가 아닐까 싶다. 


앞서 말한 '환상'이 더해지거나 '비교 가능한 정보'를 동반하는 이방인의 시각을 가지면 무언가에 대해 더 열심히, 더 자세히 분석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게 된다. 때로 이방인의 시각으로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적당히 아름답고, 적당히 책임감 가지고, 조금은 가벼울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하지만 이방인의 시각을 가지고 무엇을 본다는 것은 그 나름의 '기능'과 '매력'이 있다. 


이방인의 시각, 이방인의 시각으로 무언가를 보는것.

최근에 이방인처럼 사는 것, 이방인의 시각을 가지는 것에 대한 생각을 부쩍 많이 했다.  



20%정도는 원주민, 80%정도는 이방인의 시각으로 대구에서 살기.


중고등학교시절의 나를 돌이켜 보면, 나의 목표는 오로지 대구를 떠나는 것이었다. 대구가 특별히 싫거나 가족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라기 보다는 그 어떤 근거도 이유도 없이 대구는 나의 무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우리집'이나 '나의 가족', '친구들'이 아닌 '대구'라는 지역을 떠올리면 이렇다 할 감정, 귀가 솔깃해 지고 금방이라도 군침이 돌 만한 이야깃거리가 내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구'라는 지역은 나의 엄마나 아빠처럼 태어나자마자 이미 주어진 것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교 까지 학습하거나 경험하는 지역의 범위는 우리 엄마나 아빠의 행동반경, 그들의 정보량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이 지역에서 무엇을 하기 위해 애써 어떤 정보를 찾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다. 맛집에 가려면 엄마 아빠를 따라 가거나, 엄마에게 전화해 물어보는 것이면 되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유독 대구에서만 길을 자주 잃는다. 게다가 아직도 대구의 지도를 펼쳐보면 어딘가 모르게 이해가 안 되는 구석이 많기만 하다. '네비게이션쿵'이라고 까지 불리며 친구들에게 전국방방곡곡의 맛집 정보 서비스를 자발적으로 해주고 있는 나의 입장으로 본다면 내 고향 '대구'는 '네비게이션쿵'의 아킬레스건, 알수없는 오류로 인해 작동이 불가한 지역쯤이 되겠다.   


그랬던 내가, 요즘 대구를 중, 고등학교 때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고 있다. 10여년의 타향살이 후 돌아오니 내가 '이방인의 시각'비슷한 것을 가지게 된 것 같다. 10년 전,'곧 떠날' 혹은 '떠나야만 하는' 대구에서 살았었던 내가 스물 여덟살이 되어 '잠시 살게 될'대구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0년전에는 없었던 '비교 가능한 도시'의 정보도 내겐 있다. 무슨 말장난 같지만, 이것은 내게 놀라운 관점의 차이였다. 


주로 친구를 만나거나 옷을 사는 등 '필요'에 의해 방문하던 동성로거리와 시장통 대신 뒷골목과 샛길에서 허름한 간판의 50년 전통 맛집 같은 것을 발견하는 걷기여행을 가끔 했다.'대구를 떠나려고 준비하는' 학생들 대신에 '대구에서 살기위해' 떠나려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외선생님들의 삶이 보였다. 직접 걷거나 운전하며 지도의 조각 조각을 맞추어 나가는 일은 다른 지역을 여행할 때와 마찬가지로 짜릿하고 재미있다. 이에 더해 이 곳에서는 어린시절의 기억조각들을 맞추는 재미도 한껏 느낄 수 있다.


20%정도는 원주민, 80%정도는 이방인의 시각으로 대구에서 살기. '대구'라는 지역에 대해 생각하기로는 대구를 떠나기 전 20년 보다 최근 6개월동안 생각한 양이 더 많지 않을까. 그리고 확실히 나에겐 최근에 본 대구가 더 매력적이다. (아마 그 20년 동안은 사회과탐구시간이 대구에 대해서 생각하는 유일한 시간 아니었을까. 오히려 어린시절엔 내가 사는 지역보다 멀리 있는 연예인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했겠지. 아이러니컬하지만 자연스럽게도)



작년의 서울과 올해의 서울은 내게 어떻게 다를까


그러고 보면,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서울의 곳곳, 거리의 얼리어답터인양 핫 플레이스들의 골목 골목까지 훤히 알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서울에서 지내는 내내 이방인의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루마블 같은 보드게임을 하듯이 우연히 선택하게 된 어떤 지역에 대해서는 동네주민들이 가는 작은 떡볶이 집까지는 섭렵해야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살았던 나였기에 간혹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 말고는 서울 지리를 잘 모르는 친구들을 서울 촌놈이라고 놀리기도 했었는데.. 그러고 보면 그 친구들은 대구에 오면 대구 촌놈이 되는 나와 같았던 셈이다. 


사실 서울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생각을 했다. 서울 지리에 대해서라면 택시기사나 서울지리를 연구하는 학생을 제외한 일반적인 내 또래 친구들에 비해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구에서 서울을 오가며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경험하는 서울은 내가 알고 있던 서울과 전혀 다른 느낌의 도시였다. 솔직히 말해, 도시가 변해봐야 일 년만에 뭐가 그리 변했겠는가. 그런데 내가 너무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주민'으로 살 때와 '비지니스'를 목적으로 서울을 방문할 때 내가 서울이라는 도시를 이용하는 방식이 너무도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일 년 전엔, 남산 중턱의 조용한 동네에 월세일지언정 언제라도 들어갈 수 있는 집이 있었다. 폐차 직전의 차이지만 어디든 나의 구형 액센트를 직접 운전하며 서울의 곳곳에서 아직은 트렌드 세터들에게 덜 발견된 조용한 지역과 카페를 찾아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방문객의 입장이 되다 보니, 동인천 급행을 탈 때를 제외하면 거의 타지 않는 일호선 지하철을 하루에도 두 번씩 타야하거나 사람이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광화문, 종로, 신촌, 여의도, 강남고속터미널 등에서 미팅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때의 서울과 지금 내가 이용하는 서울은 같은 서울이지만 너무 다른 느낌이었다. 신촌역을 지나는 2호선 지하철에서 이어폰을 꽂고 생각에 잠긴 듯한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문득, 이 사람들과 나는 같은 서울하늘 아래 살았을지언정, 굉장히 다른 서울을 경험하며 살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서울 하늘 아래에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다양한 종류의 서울 경험방식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현기증이 났다. 이것이 메트로폴리탄 서울의 매력이자, 외로움의 원천 같다고 느껴졌달까. 


어찌되었건, 서울이란 도시에서는 십 년 전의 나도, 일 년 전의 나도, 지금의 나도 이방인이다. 이방인이라는 속성은 같지만 성격은 조금씩 다른. 




어찌되었건, 난 기꺼이 이방인이 되기를 선택하고 있다.  


그동안 일을 하면서 한 지역에서 꾸준히 기반을 만들고 지역을 위해 일하는 활동가들을 많이 만났다. 뜻이 좋고 지역에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함께 성장해 나가는 역량있는 활동가들을 만날 때 마다 그들이 정말 대단해보였다. 그 와중에 대구를 떠올리면 마음 한 켠에 부끄러운 마음이 일었다. 


대구에 돌아왔을 때. 내 자신에게 자문해 보았다. 내가 만나왔던 지역 활동가들 처럼 지역에 기반을 두고 일을 해 나갈 자신이 있는가? 내가 하고 싶거나 내가 잘 하는 일인가 혹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를 자문했을 때 결론은 NO!였다. 사람들과 잘 어울려 열정적으로 일을 진행하다가도 어느 순간 팔짱을 끼고 뒤로 조금은 물러나 사람들을 관찰하는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이기에 한 곳에서 우직하게 뜻하는 바를 밀고나가는 일을 하는 것엔 자신이 없었다. 집요하게 공을 몰아 나가 골대를 향해 한방을 쏘는 킥커가 보다는, 이런 저런 시각들을 제시하며 킥커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윙어가 적성에 맞다는 것을 알게 된 탓이기도 하다.


 나는 가끔 가족이나 친구, 직장 동료와의 관계에서 핵심 이해관계자가 아닌 마치 제 3자가 된 것인 양 한발짝 물러서서 내가 속한 집단을 바라보는 일이 잦다. (그래서 가끔 얄미움을 사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어디서든 이방인이 되기를 자처하는 나는, 그냥 그것이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그다지 버리고 싶지도 않은) 나의 성향 혹은 성격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방인이라는 말은 묘하게 외로운 느낌을 팍팍 풍긴다. 실제로 이방인의 위치에 있다는 것은 조금은 안정되지 못하고 종종 외로운 것이다. 그치만 촌스럽게 외로운 이방인으로 사는 신세한탄을 할 수는 없지! ㅋㅋ  오히려 내가 줄곧 생각해오고 있는 것은 이방인의 시각을 가지는 것이 주는 신선함과 크리에이티브같은 것. 그리고 그것이 삶의 많은 영역에서 긍정적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확신같은 것이다. 


 내가 요즘 고민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더 많은 새로운 지역에서 '이방인'이 될 것인가 보다는 정체된 곳에서 어떻게 이방인의 시각을 활용할 수 있는가에 더 가깝다. 내 문제와는 크게 상관없는 것 같은 친구의 말 한마디나, 끼워 맞추기 나름인 점장이의 점궤하나가 내 고민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주듯이. 


일에 있어서도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고 다양한 시각에서 문제를 볼 수 있게 하는 위치 혹은 그러한 시각을 담는 기획 프로젝트 같은 것을 계속 해보고 싶다. 사실 방법론적으로는 조직을 컨설팅 한다거나 어떤 사업의 자문회의를 구성하는 등  이방인의 시각의 강점과 원리를 차용하는 형태가 현재도 많이 있는 것 같다. 뭐 어찌되었건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이방인으로서 원주민 사회의 매력과 긍정적인 면을 발굴해 내고 드러내어 주는 것. 그것을 매력적인 콘텐츠로 만들어 원주민들에게 자긍심을 불어 넣어주는 접근법. 최근에 쓴 연등축제 외국인 방문객 백서에 쓴 표현을 빌자면 원자열 근자래[각주:1] 전략이라고나 할까. 


단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방인으로의 포지셔닝에 스스로 외로워지거나 허무해 지기를 경계할 것. 이방인의 시각을 유지하되, 원주민만큼의 고민과 진정성을 가질 것.    (음 글이 막판이 되니까 교훈적으로 흘러가는군. 역시 난 촌스럽다니까)




  1. 일찌기 공자는 '근자래 원자열'이라 하였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이 찾아 온다는 뜻으로 정치와 관련한 말인데 최근에 축제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가끔 회자되는 말이다. 여기에 쓴 '원자열 근자래'라는 말은 이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인데, 연등축제가 외국인에게는 인지도도 높고 만족도가 높은 반면 내국인들에게는 인지도가 그다지 높지 않을 뿐더러 흥미도가 다소 떨어지는 특징이 있어 외부의 평가를 내국인 홍보에 활용하라는 전략에 붙인 이름이다. (관련 내용은 연등회_연등축제 외국인 방문객 백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발행 : 부처님오신날 봉축위원회) [본문으로]


1.
작년 5월엔 천주교에서 진행하는 선택 피정에 다녀와서 큰 은혜를 입고 돌아왔는데, 올해 5월에는 일 때문에 서산 부석사로 템플스테이를 하러 갔다가 '적절하고도' '정신이 바짝드는' 생각거리들을 안고 왔다. 그러고 보면 나는 무신론자인것 같으면서도 모든 종류의 종교에 관심있어 하고 무엇보다도 '종교'라는 것 자체의 커다란 힘을 경이롭게 여긴다.  어찌보면 나는 무종교이면서 다종교이고, 그 어떤 종교에서든 사이비 신자인것 아닐까. 우연인지 몰라도 또다시 5월에 종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2.
노짱 1주기 추모 뉴스들을 딸각거리며 보다가, 서울역과 대한문을 지나며 일년전 그날을 떠올리다가 그 후, 지난 1년에 대해서 돌이켜 봤다. 유난히 햇살이 뜨거웠던 노짱의 영결식날, 나는 1년여의 방황을 끝내고 제 자리로 돌아왔고, 그 이후로는 보다 나 스스로에게, 가족이나 직업, 사회에서의 나의 위치나 역할에 보다 집중했다. 역량을 갖추지 않은 채 세상을 바꾼다는 열망에 불타는 이들 대신에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역설적이게도 사회가 진보하려면 진보한 개인이 많아져야한다는 스스로의 결론에 도달했고, 그래서 여러 사회적 이슈에 이리 저리 휘둘리는 대신, 나의 현재를 바로 보고 그 자리에서 스스로 더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금씩 나는 제자리 찾기에 열중했고, 나는 몇몇 일에서 성취감을 얻었고 낭만적이기만 하던 장래희망이 조금은 구체화 되었으며 그럴 수록 예전처럼 외롭거나 허무해 지는 일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3.
그런데, 스물여덟의 5월은 나에게 또 다른 숙제를 던졌다. 그것은 며칠전부터 내 마음을 계속 힘들게 하는 전화한통에서 부터 템플스테이, 주경스님의 글 한구절, 간만에 한 소개팅, 심지어 친구들이 여자친구와의 다툼을 이야기 할때 까지 계속 다른 형태로 던져졌다. '너무 스스로의 세계에 빠지는 것을 경계할 것', 요약하자면 그런 이야기다. 

3-1. 
이상하게도, 요즈음 나는 친구들이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와 다투었던 이야기를 꺼낼 때, 나도 지금 당장 연애를 해야하는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든다. 나와는 전혀 다른 어떤 행성이 나의 행성과 계속 부딫히며 어떤 액티비티를 만들어 주는것. 이왕이면 정말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과 서로의 세계를 조금씩 조금씩 보여주다가, 말로는 도저히 설득하지도 설명하지도 못하는 지점을 맞닥뜨리고 그제서야 그것을 그대로 인정할것인지, 조금더 이해하거나 이해시키려 노력할지를 고민하는 그런 과정. 그리고 그 모든것에 노력을 기울이는것. 그런것이 지금의 내게 필요한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한친구가 사람을 만나는 것이 귀찮은게 아니라 두려운것 아니냐고 물었는데,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행성과 크나큰 접촉사고를 일으켜 큰 소리를 내거나 사랑하는 마음이 커질 수록 노력해야한다는 그 사실이 벌써 까마득 하게 두려운것인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찌되었건, 연애라는 것은 성인 성장의 필수 영양소임엔 틀림이 없다. (내 연애관은 정말 얄미로울 정도로 개인주의적이구나.ㅋ)

3-2.
".... 이심전심이 통하지 않는 겉모양만의 선문답은 하는중에도, 끝나고 나서도 참으로 공허하기 이를데 없다. 그저 자신이 겪은 신체적 변화나 조금 신기한 체험이 대단한 깨달음인줄 알고 점점 강한 집착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대부분 꾸준한 대화를 통해 잘못된 집착과 미련을 털어버리지만, 개중에는 상당기간 방황하며 여기저기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인가를 받으려고 하는 이들도 있다. ..... 깨달음에 대한 지나친 의지와 급한 마음이 이러한 병통을 불러오곤 한다....배우는 사람은 스승과 선배수행자들을 존경하는 마음이 약하고, 먼저 수행한 사람들은 아랫사람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 그래서 각자 자기 자신의 좁은 소견에 파뭍혀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병통이 아무리 깊어가도 자신도 주변사람들도 알수 없는 중증이 되기 쉬운 것이다" - 주경스님

잘생긴 (ㅋㅋ) 주경스님의 법문집을 꺼내어 읽다가 아주 따끔한 구절을 발견했다. 사실은 며칠동안 나를 힘들게 하던 말들과도 일맥 상통한면이 있는 글들. 성공이나 인정의 욕구가 클 때, 내 자신도 모르게 비교의 화법을 쓰거나 비판의 화법을 쓰게 되는데 남들이 그러한 화법을 쓸때 마음이 상하거나 팔짱을 끼고 그의 무례함을 탓하면서도 정작 내 자신이 얼마나 그러한지는 모니터링하기 쉽지 않은 법. 집착과 지나친 의지를 버리는 것도 내겐 쉽지는 않은 일일테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숙제 하나는 명확하게 건졌다. 

3-3.
'불교와 마케팅은 정말 정말 비슷한 구석이 많은 학문이예요'
최근에 같이 일하게 된 Maya님은 학부때 불교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마케팅을 전공한 독특한 학력의 소유자인데 밥을 먹다가 우연히 듣게된 그녀의 이야기가 참 흥미로웠다. 불교나 마케팅이나  '사람에 대한 이해'가 두 학문의 기본 바탕이라는 것이 그녀의 이야기 였다. 그럴싸 하다. 그러고 보니 학문과 일, 종교와 기술, 그외의 많은 영역에서 사람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는 영역이 있기나 할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날 주경스님과의 대화시간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연등축제 외국인모니터링다 친구들과 함께한 자리라 주경스님과 영어로 대화하는 기회를 맞이 했는데, 조금은 수줍게, 더듬 더듬 이야기 하셨지만 그 이야기가 너무 강렬해서 눈물이 찔끔 났다. 
'내가 누군가를 이해 하려고 노력을 하든 그렇지 않든, 세상은 똑같이 흘러갈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우리 주위의 사람들도 크게 변할건 없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와, 그 누구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 사회의 모습은 분명히 다를것입니다.'

며칠전부터 화가나는 일이 마음을 떠나질 않아 '이해하려 노력할수록 화가 날 때는 어떻게 해야합니까?'라고 물으려 할 즈음에 스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전의 생각, 이전의 관념, 이전의 경험에서 벗어나 눈앞의 사실을 보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Slowly but Surely
요즘 하루에도 몇번이고 나 스스로에게 하는 충고.

돌이켜 보면, 난 바쁘지 않았던 적이 별로 없었다. 꽤 오랫동안 내가 워커홀릭이라거나 회사가 나를 바쁘게 만들었다 생각했는데,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난 고등학교 때에도 친구들에게 굉장히 '바쁜 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가끔 그런것들이 짜증이 난다. 모처럼 얻은 휴가에 굉장히 빡빡한 여행일정을 계획하여 다닌다던가, 프로젝트가 끝나서 조금이라도 쉬는 시간이 주어지면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이 왠지 불안해서 약속을 막 만들어 낸다던가 하는 나의 오랜 습관들. 얼마전에 의사가 일도 하지말고 운동도 하지말고 집에만 있으라고 할 때, 그것이 경고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에겐 너무 과한 충고라고 느껴졌었다.

그렇게 안달내고 바쁜 것을 자처했던 것은, 언제나 나는 뭔가를 빨리 이루어 내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28년동안 계속 된 나의 경험에 의하면, 뭔가를 빨리 이루려고 안달을 내고 과도한 계획을 세우는 것은 대체로 성공보다는 실패의 확률이 높았다. 며칠전에 친구와 함께 나눈 예를 들자면, 한달에 1킬로그램씩이면 다섯달 동안  5킬로그램을 뺄 수 있는데, 항상 우리는 한달에 3킬로 그램을 빼겠다는 과도한 계획을 세워 실패하고, 좌절하며 결국은 다이어트를 포기하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몇달이 흘러 위기감이 들었을때, 또 한번 우리는 한달에 3킬로 그램이라는 과도한 감량 목표를 세운다. 이번에는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으며.


또, 쉽게 얻어지지 않을 것에 대해서는 금세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생각만큼 성취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상이상으로 좌절하기도 했다. 그 결과로, 나는 어떤부분에서 굉장히 성숙한 의견을 가지면서도, 가끔 상식이 부족해 사람들을 놀래켰다. 그리고 또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어른 스러웠고, 어떤 면에서는 막둥이 동생보다 더 애 같아서 나 스스로 느끼는 불균형이 생각보다 굉장히 컸다. 어쩌면 내가 오랫동안 가져왔던 관계에 대한 불안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가 될수도 있을것 같다.

사람들마다 저마다의 삶의 방식, 저마다의 관심분야가 있고 그에 따라서 잘 살면 되는 것이라고, 아무도 완벽하게 살수는 없는 것이라고, 세상의 이치를 다 알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은 잘하지만 그것이 나의 문제가 되었을 때, 욕심이 많은 나는 쉽게 질투하고 쉽게 좌절했다. (얼마전에 친구가 나에게 기사 한장을 내밀었다. 그 기사는 명지대 김정운 교수가 쓴 '세상을 바꾼다는 욕심을 버리면 삶은 행복하다'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얼마전에 행복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사람들 중 상당한 비율의 사람들이 (어쩌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나친 자기 효능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어떤 일을 하거나 시험을 칠때, 자신이 다른사람보다 혹은 준비해왔던 것에 비해 잘할 것이라고 믿는 다는 것. 어쩌면 나는 그 정도가 심한 사람인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언젠가 친구가 '성실한 것'과 '부지런한 것'을 구분하는 법을 알려준 이후로 (이 분류법은 내게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나는 '성실한' 사람들을 정말이지 마음속 깊이 존경하게 되었다.
내가 굉장히 존경하고 곁에 계속 두고 싶어 하는 친구들은 대체로 고등학교때에도 대학교에서도 그리고 직장에서도 주어진 환경,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아주 열심히 성실하게 해왔던 친구들이다. 난 그런사람들이 내 곁에 있을때 안정감을 느끼고 나의 배우자 역시 그런사람이어야 한다고 오래전 부터 생각해왔었던 것 같다. 나는 그런사람들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들에게서는 어딘가 모르게 단단함과 안정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처음부터 주목을 받건 아니건, 결국에는 인정받는 사람은 '성실하게' 어떤 일을 해내는 사람인것 같다. 그 과업이 쉽건 어렵건, 재미있든 그렇지 않든 일관되게 평균적인 성실함을 유지하는 그런 사람들.

요즘 나는 중고등학교때 배웠지만 나는 잘 이해 못했었던, 대학교때 보긴 봤으나 깊이 읽으려 하지 않았던 책이나 주제들을 다시 책상위로 꺼내놓곤 한다. 며칠전엔 고등학교 문법 교과서와 시민윤리 교과서도 샀다. (음. 이것은 내가 겪었던 교육과정엔 없었던 과목이긴 하다 ㅋㅋ) 조금은 여유가 있는 요즘, 나머지 공부를 하는 심정으로 (ㅋㅋ) 조금 더 스스로 단단해 지려는 노력의 일환이랄까.  

하루에도 몇번씩 Slowly but surely를 되뇌이지만, 여전히 나는 안달이 난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바쁜사람일 확률이 높고 성실하려 노력하겠지만 여전히 '부지런' 할 때 에너지가 넘칠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것, 조금은 솔직하게 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 지금은 이만큼 왔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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