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쿵쿵,
잘하고 있어.

이상에 좌절한 다음에 수도없이 합리화를 하면서
나 어릴땐 꿈이 있었다며 씁쓸해 하지 않을거야.

이상을 추구하는 것도
좌절하는 것도
합리화를 하는것도
다시 꿈을 꾸는것도

그것이 다 사람 모습이라며, 그리고 그것이 내 모습이라며

때로는 베테랑 공무원 아저씨처럼 어깨툭치며 웃고 슬쩍 넘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어르신들과 싸워야 하기도 해야된다는 것을 알고

욕하고 미워하면서도 사랑하고,
사랑할수록 내 감정을 드러내보일줄 아는
그런 어른이 될래.


최근에 부쩍 '세대'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 내 자신을 관찰하다보니까
겉으로는 386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야기 하면서도
한편으로 누구 말 마따나 '세기의 왕따'인 우리세대의 문제가
절대 나를 비켜가지 않을거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되어서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자꾸만 불만의 신호를 보내고있다는 것도

어제 자전거를 타는데 문득 억울한거야
스물일곱, 한창의 나이에 고작 하고 있는 생각이
사회구조나 역사에 대한 불만이나 소심한 비판이라니

머릿속에 있던 재미있는 아이디어나
길가다가 본 신기한 것들
사실 그런 소소하고 유쾌한것들을 즐기기에도 바쁜데
그런것들 다 어디 갖다 팔아버리고
왜 자꾸 진지해지냐고.
촌스럽게

평가가 많고 말이 많아 판단 유보가 많은 시절에는 그 어떤일도 잘 안된다는 것을
그 어느때 보다 잘 느낄수 있는 시절에 살고있어서 그런걸까.
지금은 백마디 말, 천가지 생각 보다는
그냥 작고 시시한 것이더라도 해버리고 '내가 깃발 꽂았다.'라고 외치는게 더 중요한 때인것 같아. 

또다시 백마디 말과 천가지 생각이 중요해지는 시절은 돌아올거야.
그치만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어.
그렇게 할래. 용기를 내어!
그리고 지금도 잘 하고 있어.

화이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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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존심

중고등학교시절 윤리책에서 강요하는 애국심에 동감하지도 않았고,
한일전 축구경기때 너무 뜨거워 다가가기 힘든 어떤 감정에 동요하고 싶지 않아했지만
언젠가 비전 발표를 할때, 자기비판을 하는 대한민국사람들 속에서 그들을 위한 일을 하고싶다고 말했다.
아마도 내 나름의 애국심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어쩌다가 그말을 하게 된지 나도 의아했지만, 이민이나 유학이 성공의 기준인양 이야기 하는 앞 발표자들이
촌스럽다 여겨졌거나, 갑자기 화가나서 다혈질 적인 내가 그런말을 했던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작년이맘때 광우병파동으로 부터 그 이후로 주욱,
나는 애국심처럼 간지러운 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자존심'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했는데,
그때 내가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한 기제로 가장 많이 이용(?)을 했던것이
'촛불'과 '노짱' 그리고 그것을 키워드로 모인 사람들이었다.

노짱이 하늘나라로 간 다음날 새벽에 찾은 시청앞
텅빈 거리, 새까맣게 줄서있는 닭장차와 전경들
촛불은 찾아 볼수 없고,
저 닭장차 너머에서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알수가 없다.

그래도 작년 이맘때엔
그곳에서 희망을 보았는데,
전경그득한 그 거리를 마주하는 순간
자존심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망연자실'
그느낌이 뭔지 알것 같았고,
닭장차 너머 옹기종기 모여 분향소를 지키는 이들의 얼굴에도
그 느낌이 그득했다.

어제아침부터 계속 지울수가 없는 느낌은,
나는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내 자존심의 일부를 잃어버린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서 자꾸만 슬픔 보다 분함이나 억울한 감정이 앞섰나부다.


2. 이상과 좌절

얼마전에 읽은 책에서 이상주의자일수록 우울증이나 병적 게으름에 빠질 경향이 강하다는 구절을 보고 고개를 끄덕했다.

최근에 풀집 이윤호 대표의 이야기가 계속 생각이 났는데,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뜻있는 친구들 끼리 전혀 새로운 교육프로그램을 기획하려 했는데
그 과정에서 발견했던 것은, 그렇게 뜻있게 모인 이들 또한
보수적인 교육을 받아왔던 이들이었기 때문에 그 한계를 발견하고 인정하기까지가 어려웠다는것

이상을 이야기 하는 이들에게 '현실'은 변화하거나 개혁해야 하는 대상이지만
많은 경우에 비판이나 비난의 대상이 된다.
요즘들어, 전자와 후자사이엔 일종의 선후나, 인과관계가 성립할 수 있고,
그 사이에는 뼈아픈 '좌절'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또하나, 느끼는 것은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그리고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의 현실이 비판의 대상이나 좌절감의 모체가 되었던것 아닌가 하는것이다.

그리고, 나름 평안한(아니 어쩌면 고요한) 시대를 살았던 나와 나의 또래들은
변화나 개혁의 논리나 당위보다는
비판과 좌절의 말들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었다.

이런저런연유들로 386들이 야속했었는데
요즘 '좌절'이 나의 화두가 되면서 386들이 안쓰러워 졌다.

비슷하지만 또 조금은 다른 이유로 근 몇달간의 노짱이 안쓰러웠었다.

그리고 착잡한 이 주말이
우리에게 또 한번의 좌절인거 아닌가 싶어
두렵고 착잡하다.



3. 무엇을 해야할까.

나는 사실 정치에는 별 관심도 없었던 88만원세대인데다
~~이즘을 강조하며 자신들의 정치방향이 옳은길이라 주장하는 모든정당도 딱히 맘에 내키지도 않을뿐더러
언제나 정치적인 것에 대한 해석은 나 중심적이고
촛불집회같은 건 한밤중에 혼자 슬쩍 나가서 옵저버처럼 관찰하는 소심함까지 갖추었는데

이렇게 자존심 상하고, 좌절감이 몰려들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토요일 아침
갑작스럽게 찾아온 감기에
일은 일대로 끝내지 못하고
집에도 가지 못하고
여러모로 마음이 안좋았던 아침

동생과 엄마의 전화를 받고
미안하다는 말을 여러번 하고
티비의 전원을 켜는 순간.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이건 놀람도 아니고,
당황한것도 아니고
가슴먹먹 눈물이 나는것도 아니고
소름이 돋는 것도 아니고

그저 멍 -
그렇게 주저앉아 한참을
뉴스채널을 돌리며 티비를 째려보고 앉아있었다.

청와대와 정치권은 애도를 표하기에 앞서 사건의 경위를 파악하라는 투였고,
불확실한 정황이나 추측성의 이야기를 앞세우며 '자살'로 결론내리기를 부추기는
경찰과 엠비씨 아나운서를 한대씩 패주고 싶었다.

결국 문재인변호사의 짧은 브리핑을 통해 그 것이 '사실'로 밝혀지고 있는데도
나의 분함과 불안이 사라지지가 않았다.

왜?
이 아침에, 애도하고 슬퍼하기 보다는
불안해 하고 분해 하는거지?
아마추어같이..


나를 지켜보며 생각했다.

그래 사실은,
사실관계가 어찌되었건
나는 믿고 싶지가 않은것이다. 지금

사실 그렇게 믿어버리려면
또 이 사실을 내가 받아들여야 하고
그를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합리화에 이르러야할지
지금 당장은, 아무런 대책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분은 내게
믿음이 가는 존재,
보살님의 표현대로라면 '덕'이 있는 존재
언제나 내 마음속 한켠에서 지지를 보내고 있는 대상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나를 지켜보며, 또 발빠른 머리는 나의 상황을 이입시켜본다. 감히.

원칙을 강조하던, 누구보다 논리적이었던 대통령은
어쩌면 믿고 싶지 않은 사실들이 밝혀질때 마다
큰 좌절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어제 저녁식사시간에 동료들과 이야기 했듯이
386의 사회적 좌절감이나,
청소년들이 작년 촛불에서 맛본 좌절감,
내가 일하면서 맛본 좌절감같은

어디 비할데가 있겠냐만은,
같은 사람이니까. 그리고 우리는 관계와 사회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어디에서나 생길 수 있는 그런 좌절감.


대통령의 죽음이 내게 또 하나의 좌절감으로 다가오지 않게 하기 위해
뉴스 속보를 계속 새로고침하며 동요하지 말자고 나를 도닥인다.

믿고싶지 않으면 그 감정은 감정대로 인정을 하고,
기도해드리자.

부디 좋은곳으로 가시라고.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를 훌륭하고  '중요한' 대통령으로 기억할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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